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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토피아 그림엔 2234명 활기찬 시장… 그때도 ‘문제는 경제야’[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입력 | 2024-11-26 23:00:00

조선 후기 병풍 그림 ‘태평성시도’
18세기 말~19세기 초 그림 추정… 식품-생활용품 상점과 인물 생생
건물과 등장인물 의복은 중국풍… 풍요로운 이상적 도시 모습 구현



조선 후기의 이상적 도시 모습을 그린 ‘태평성시도’. 좌우로 펼치면 높이가 1m가 넘고 폭은 4m에 이르는 8폭 병풍 그림이다. 1797년에서 1812년 사이 조선 왕실에서 김홍도 화풍을 추종하던 도화서 화가들이 제작한 그림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에는 의복과 기호품을, 왼쪽에는 식료품과 문방구, 생활용품을 취급하는 상점이 주로 그려져 있다. 당시의 구체적인 상업 활동을 잘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경제에 관한 가장 뜨거운 논쟁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을 손꼽을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근대적 시장경제의 싹이 내재적으로 움트고 있었다는 학설이다. 한국 땅에 자본주의가 외부에 의해 이식된 것이 아니라, 18세기부터 자체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걸어 나갔다는 주장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조선 후기 일부 경제 지표가 좋아졌지만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한 뚜렷한 시장경제의 근거는 미미하다는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선 후기 상업화에 대한 인식을 재검토하게 할 만한 그림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태평성시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8폭 병풍 그림은 좌우로 펼치면 높이가 1m가 넘고 폭은 4m에 이르러 거대한 화면을 자랑한다. 화면 속엔 큰 도시 하나가 마치 고화질 드론으로 촬영한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돼 있는데, 처음 보면 건물과 인물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 당혹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도시를 활보하듯 차근차근 시선을 옮겨 보면 그림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보통 병풍은 맨 오른쪽을 1면으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순서대로 감상하는데, ‘태평성시도’의 경우 맨 왼쪽의 8면에서 감상을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높은 성벽이 8면을 가로지르는데 한가운데 놓인 3층 누각의 성문을 지나면 실제로 도성 안으로 들어간 느낌이 들게 된다. 이렇게 도성을 들어서면 군사훈련을 하는 병사와 분주히 강을 준설하는 장면이 담긴 7면을 만난다.

6면부터는 본격적으로 도시의 일상이 분주히 펼쳐진다. 상점이 빼곡히 들어간 상가들이 화면 아래위로 세 줄을 이루는데, 여기에 수많은 인파가 등장한다. 갑자기 왁자지껄한 대도시 한복판에 들어선 듯하지만 7면 하단의 다리를 따라 난 큰길을 기준으로 상점가를 하나씩 감상하면 길을 잃지 않게 된다. 다음엔 시선을 위로 옮겨 이 길 위로 난 길을 따라 도시를 조망하고, 눈길을 화면 상단으로 올리면 주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수미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에 따르면 등장인물이 2234명에 이른다. 이들은 3cm 남짓한 작은 크기이지만 표정과 행동에 개성이 넘친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면부터 식당가, 공방, 길거리 공연, 아이들 놀이 등 도시에서 벌어질 법한 모든 것이 펼쳐진다. 한마디로 조선 후기의 시각 세계를 담은 경이로운 그림이지만 이 그림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다. 건축물이나 등장인물의 의복이 중국풍으로 국적 문제 등을 해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 학예실장의 연구로 조선 후기 그림임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소반 같은 조선 전통 가구, 중국식 입식이 아닌 좌식 생활, 조선 후기 풍속화 화풍 등이 그 근거다.

이제는 1797∼1812년 사이 조선 왕실에서 김홍도 화풍을 추종하던 도화서 화가들이 제작한 그림으로 보고 있다. 제작 시기를 좁힐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한양 도성에 대한 그림이 자주 그려졌고, 수원 화성 같은 신도시가 건설되었으며, 도시 그림을 보고 시를 짓는 경연도 열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울이나 수원 화성 같은 당시 도시의 실제 풍경을 담은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은 당나라나 송나라 때 중국식 복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군데군데 동시대 청나라 수도 연경을 연상시키는 장면도 담고 있다. 여기에 녹로(현대의 기중기) 같은 조선의 최첨단 건설장비까지 등장한다. 종합하자면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상상하는 유토피아적 도시를 당시 세계관에 맞춰 펼쳐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이상화된 유토피아라도 그림 속 시장의 모습은 실제인 듯 생생하다. 상점이나 상거래 인물들은 실제로 관찰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면 그릴 수 없는 것이라 조선 후기 사회의 활발한 상업 분위기를 가늠하게 한다. 예를 들어 식료품점은 채소, 과일, 곡식, 정육, 생선, 건어물, 조육(鳥肉)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품목별로 구분되어 있다. 기호품의 경우에는 마구, 담뱃대, 거울, 칼, 안경, 부채, 우산, 가위, 꽃, 가구 등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취급하는 물품의 특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여기에 각 상점이 지향하는 경제적 문구도 적절히 등장하고, 거래하는 인물들도 상황에 맞게 잘 연출돼 있다.

이렇게 ‘태평성시도’는 당시 조선 지배층이 꿈꾸는 이상적 도시의 모습을 실재와 이상을 섞어 다채롭게 구현했다. 흥미로운 건 조선시대 유토피아에서도 경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역시 경제’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준다. 오늘날의 위정자들이 경제난 속에 경세치용의 혜안을 내놓기를 기대해 본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