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키드’에서 엘파바를 꾸며주는 글린다의 모습. 영화는 두 여성의 우정을 그린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파퓰러! 넌 이제 곧 파퓰러~”
마법의 나라 오즈 북부 길리긴에 있는 시즈 대학. 예쁘고 인기 많은 대학 퀸카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뛰어다닌다. 피부가 초록색인 탓에 친구가 없는 왕따 ‘엘파바’(신시아 에리보)를 꾸며주는 일에 신난 것.
사실 룸메이트인 글린다와 엘파바는 사이가 좋지 않은 ‘앙숙’이었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을 겪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쌓은 뒤엔 ‘절친’이 된다. 이후 글린다는 엘파바의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하는 법을 알려준다. 자신의 상징 같은 분홍색 옷도 선물한다. 글린다는 “패션과 머리를 꾸미는 법까지 모든 걸 바꾸면 앞으로 넌 인기가 많아질 것”이라며 “핑크랑 초록색이 잘 어울린다”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두 사람은 싸우다가도 화해하며 절친이 된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 “이기지 못할 싸움은 없어”…뮤지컬처럼 ‘여성 우정’ 다룬 영화
20일 전 세계 최초로 국내 개봉한 영화 ‘위키드’는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처음엔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미워했던 두 젊은 여성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 이 때문에 2시간 40분의 러닝타임 중 대부분을 엘파바와 글린다의 대학 생활에 할애한다.
특히 두 사람의 우정은 영화 후반부 ‘오즈의 마법사’에 대항해 글린다가 길을 떠날 때 두드러진다. 글린다는 엘파바를 따라가진 않지만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넌 뭐든지 할 수 있다. 한계가 없다”고 응원한다. 피부가 초록색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편견에 시달렸던 엘파바를 백인에 금발을 지닌 글린다가 품는 것. 우정이 차별을 다독일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영화 막바지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부르는 노래 ‘Defying Gravity’는 두 사람 관계를 상징한다. 3옥타브 파까지 내지르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노래와 연기가 더해지면서 두 사람의 우정을 표현하는 것. “우리가 이기지 못할 싸움은 없어/너와 내가 중력을 벗어나면/우리 함께 중력을 벗어나면”
영화는 뮤지컬 ‘위키드’의 흥행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에스앤코 제공
이같은 연출은 뮤지컬 ‘위키드’와 유사하다. ‘라이온킹’의 뒤를 이어 미국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흥행한 뮤지컬 2위를 기록하고 있는 흥행작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른 것. 그 덕에 영화는 개봉 첫 주 오프닝 수익으로 전 세계에서 약 1억642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브로드웨이 원작 영화 중 ‘레미제라블’(2012년)을 제친 최고 오프닝 수익이다.
장편소설 ‘위키드’ 표지. 민음사 제공
● “사악하게 태어났을까”…‘악의 본질’ 탐구한 소설
반면 미국 소설가 그레고리 맥과이어가 1995년부터 출간한 장편소설 ‘위키드’(전 6권·민음사)는 ‘악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두드러진다. 고전 동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는 ‘서쪽 마녀’가 사실 선(善)이고, 동화에서 선한 역할을 맡았던 오즈가 악(惡)이라는 단순한 패러디를 넘어 인간 심리를 심도 있게 다룬 것.
특히 소설은 초반부 엘파바가 부모에게 미움을 받은 과정을 자세히 그린다. 소설에서 엘파바가 태어난 뒤 아버지는 액막이 의식을 준비한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엘파바의 피부색을 하얗게 만들어달라고 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직업은 목사. 아버지는 자신의 ‘초록색 아이’를 고치기 위해선 마법의 힘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듣자 이렇게 소리친다.
“어찌 감히 그런 망발을! 이 집에서! 이 초록색 아이만으로 (내 삶에 대한) 충분한 모욕이야. 마법은 부도덕한 자들이나 의지하는 도피처요. 말짱 사기가 아니라면 위험한 악이지!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소설은 글린다보단 엘파바의 서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민음사 제공
작가가 악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 건 ‘제임스 불거 살인 사건’ 때문. 1993년 영국 리버풀에서 당시 만 2세였던 제임스 패트릭 불거가 당시 만 10세였던 두 소년에 의해 납치돼 잔인하게 죽은 사건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아이들이었던 사건이 과연 악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됐다. 작가는 2021년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회했다.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아이들이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두가 이렇게 물었다. 그 소년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악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사악하게 태어났을까, 아니면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든 상황이 있었을까? 그것은 나를 다시 모든 사람을 괴롭히는 사악함에 대한 질문으로 몰고 갔다.”
미국 소설가 그레고리 맥과이어. 민음사 제공
● “사랑 주는 법 모르는 엘파바”…선한 영웅 맞나?
소설은 더 나아가 과연 엘파바가 정말 선한 영웅이 맞는지도 질문한다. 예를 들어 엘파바는 동물들에게 가해지는 박해와 차별에 격렬히 분노한다. 하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에겐 애정을 보이지 않는 모습도 지녔다. 엘파바가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엘파바를 단순한 영웅으로만 그리진 않는 것이다.
원작 소설을 번역한 송은주 번역가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었으나 좌절당한 엘파바는 그 결핍을 채울 수가 없어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뒤틀린 삶을 산다”며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까지도 사랑을 줄 줄 모른다. 그것이 엘파바의 비극이다”라고 평가한다.
엘파바가 동물 편에 선 건 오로지 선의 때문 만은 아니다. 민음사 제공
이처럼 엘파바는 오로지 선의에 의해서만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동물을 돕는 건 초록색 피부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처럼 취급받았던 과거 때문이고, 퀸카 글린다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건 열등감이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우린 엘파바를 보며 공감한다. 한 인간은 선과 악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는 걸 이 작품이 보여주기 때문. 이 지점이 고전동화(‘오즈의 마법사’)를 현대소설(‘위키드’)로 탈바꿈시킨 지점일 것이다.
“마녀는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전에도 늘 그랬다. 오즈의 혹독한 정치적 기류에 쓰러지고 내동댕이쳐지는 바람에, 그녀는 말라비틀어져 뿌리도 내릴 수 없게 된 묘목 꼴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나 저주는 그녀가 아니라 오즈의 땅 위에 내렸다. 오즈가 그녀의 삶을 뒤틀어 놓았을지언정 한편으로는 그녀를 강력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던가?”
엘파바는 방황하는 인간의 표상이다. 유니버셜픽쳐스 제공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