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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서 사형판결 뒤 작심발언으로 구사일생… 캠핑카 만드는 前 북한군 전차장의 삶[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4-12-01 08:00:00

권효진 ‘캠핑대장 팔라스’ 제작반장




북한에서 신문주필로 일했지만, 한국에 와선 각종 차량을 캠핑카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는 권효진 씨.

매일 평균 10여 명이 들어오고, 매일 평균 5,6명은 죽어나가는 지옥이 있다. 이 지옥에서 3년을 버틸 확률은 50% 미만이고, 10년을 버틸 확률은 0.01%쯤 된다. 그곳은 북한 교화소이다.

권효진 씨는 이곳에서 6년을 버티고 살아남았다. 예심기간까지 합치면 7년 이상 수감 생활을 견뎌냈다. 그가 출소할 때 증명서를 확인하던 철도안전원은 “영웅이 나왔다”라며 경의를 표하고,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편의까지 봐줄 정도였다.

권 씨는 군에서 기계화부대 전차 전차장을 지냈고, 사회에 나와서는 대학 졸업 뒤 대기업의 노동당 선전부 소속 신문주필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도와준다고 했던 심부름 하나 때문에 사형 판결까지 받았고, 나중에 감형됐지만 16년형을 선고받았다.

교화소에서 나온 뒤 탈북한 그는 현재 한국에서 탈북문인단체 ‘국제펜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을 맡으며 캠핑카 제작도 하고 있다. 탈북민 중에 권 씨만큼 오랜 기간 북한 인권의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해 SUV를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 권효진 씨.



●졸업증도 못 받고 간 군대
권 씨는 1961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8살 때 집안에 큰 풍파가 닥쳤다. 북한군 6군단 정찰상급참모(중좌)였던 아버지가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을 지내다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라고 숙청된 최광의 일당으로 몰린 것이다. 이로 인해 노동당에서 출당되고 군복도 벗어야 했다.

이후 아버지는 청진제강소 회전로 직장에 노동자로 가게 됐다. 회전로공은 1시간만 일해도 얼굴이 새까맣게 돼 누구나 기피하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군소리 한 마디 내지 않고 버텨냈고, 1973년에 다시 노동당에 복당하고, 제강소 자재과장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

권 씨가 1978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청진은 ‘패싸움의 도시’로 악명이 높았다. 권 씨가 살았던 동네는 특히 패싸움이 일상처럼 벌어지던 곳이었다. 그도 어렸을 때부터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싸우는 법을 익혔다. 그림을 잘 그렸던 권 씨는 1975년 청진에 생긴 예술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지만, 7개월 만에 싸움에 연루돼 퇴학당했다.

청진의 패싸움은 1977년 9월 25일을 기점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날 청진역 앞에서 패싸움이 벌어져 두 명이 삽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김일성에게 보고되자 중앙에서 검열단이 들이닥쳐 패싸움 가담자를 잡아서 깊은 산골로 추방했기 때문이다. 권 씨도 이때 체포됐지만 제강소 자재과장인 아버지가 시멘트 두 트럭 물량을 뇌물로 바치고 풀려나 추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몇 달 뒤 이듬해 3월 학교 사로청지도원이 수업 중인 교실에 들어와선 “권효진, 김광원은 가방을 싸고 나오라”고 외쳤다. 권 씨는 패싸움 문제로 다시 잡혀가는 것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지도원 방에 들어가니 “군사동원부를 찾아가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시를 받는다.

이튿날 군사동원부를 찾았을 때 그는 또 한 번 놀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그에게 군 입대가 결정됐다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이던 아버지가 학교에 부탁해 입대를 시켜달라고 부탁한 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권 씨가 2016년 경남에서 지역 마을 리모델링 사업에 참가해 벽화를 그리고 있다.



● 전차를 7년 몰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권 씨는 820훈련소 776사단에 입대했다. 820훈련소는 위장 이름인데, 북한에선 ‘탱크지도국’이라고도 불렀던 유일한 기계화군단이다.

그가 입대했을 때 820훈련소는 105사단과 776사단으로 구성됐다. 105사단은 평남 숙천에, 창설된 지 1년도 안 된 비밀부대인 776사단은 강원도 판교군 지하리에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남침의 앞장에 설 부대들이었다.

함께 입대한 같은 반 친구 김광원은 105사단 이계섭중대에 배속했다. 북한군에서 제일 먼저 ‘3대 혁명 붉은기 중대’ 봉화를 든 곳이다. 이런 이유로 북한이 고위간부 자제들에게 군 복무 및 노동당 입당이라는 스펙을 쌓기 위해 거쳐 가게 하는 곳이었다. 당시 중대엔 민족보위상을 지낸 최용건의 아들, 북한 외부상을 지낸 백남순의 아들 등이 복무 중이었다. 김광원은 김정일의 공식 부인인 김영숙의 남동생이었다. 4년 전 누나가 김정일과 공식 결혼하면서 특별관리대상이 돼 이곳에 배치된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증도 받지 못하고 남들보다 일찍 군에 온 두 명의 절친은 이후부터 걸어가는 길이 달라졌다. 한 명은 로얄 패밀리의 일원으로 체계적인 관리를 받는 승진 코스를 탄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사고 방지용으로 조기 군입대를 한 것이었다.

김광원은 군 생활을 짧게 마치고 보위대학에 갔고, 나중에 9군단 검찰소 검사를 하며 기세등등하게 살았다. 하지만 끝은 좋지 못했다. 마약을 하는 사실이 적발돼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시는 김정일이 고용희에게 빠져 김영숙을 멀리하던 때였다. 끈 떨어진 남동생은 더 이상 로얄 패밀리로서 대우받지 못한 채 숙청된 것이다.

776사단은 당시 소련제 T-55전차와 이를 복제한 중국제 T-59 전차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단은 공격 훈련과 함께 방어 훈련도 했다.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원산 인근에서 상륙작전이 벌어지면 이를 방어하는 것과 판교 주변의 미루벌에 육전대가 투하되면 이를 소멸하는 것이었다. 6.25전쟁 때 원산상륙작전과 평북 숙천에 공수 낙하한 미군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경험에서 마련된 훈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권 씨는 간부들에게서 사단의 원산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978년에 건설된 평양-원산 고속도로의 노선이 변경됐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평양-원산 고속도로는 판교에 가깝게 남쪽으로 노선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간다.

그는 입대 초기엔 장탄수로 1년, 조준수로 2년을 복무한 뒤 4년차에 전차장이 됐다. 매우 빠른 진급이었다.

1980년대 좌우만 해도 북한의 경제사정이 괜찮아서 전차 기동훈련을 위한 연료는 충분히 공급됐다. 매년 평남 양덕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기동 훈련을 한 번씩 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 동안 훈련은 진행됐다. 보름 훈련 때는 강원도 철령을 넘기도 했는데, 도로가 너무 나빠 전차병들 사이에서 “전쟁 때 어떻게 이런 도로로 다니냐”는 푸념이 나왔다.

전차병 생활 중 가장 고된 기억은 1982년 한미의 팀스피리트 합동훈련에 대응한 훈련 때였다. 사단 전차들을 3일 동안 밤낮없이 기동과 은폐를 반복하면서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졸음운전으로 민간 차들을 들이박고, 심지어 기관차를 박은 전차도 있었다.

캠핑카 제작 일을 마친 뒤 서예학원을 찾아가 한국식 서체를 익히는 일은 권 씨에게 중요한 취미생활 가운데 하나다.



● 굶어죽은 천재들
7년 동안 전차병으로 근무한 권 씨는 마지막 근무 3년 동안 여단 사진사로 일했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권 씨는 전차장 시절 대대의 벽보와 선전화를 도맡아 그리는 직관원도 겸했다. 이런 사실이 여단 지휘부에 알려지면서 보직이 바뀐 것이다. 

당시 여단에는 역사 기록용 사진기 1대와 당원증용 증명사진, 우수 군인 및 가족 촬영용 사진기 1대가 있었다. 기록용 사진기는 군관이, 촬영용 사진기는 여단 사진사가 갖고 있었다.

사진사 일은 나름 편안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1987년 제대를 1년 앞두고 대학에 추천받게 됐다. 사회 물정을 잘 몰랐던 그는 대학 리스트만 보고, 이수복대학이란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선택했다. 6.25전쟁 때 기관총을 몸으로 막아 영웅이 된 이수복은 북한 사람들에겐 공화국 영웅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평남 순천에 있는 대학은 순천비날론기업소에 소속된 화학단과대학이었다. 권 씨가 그림을 그려보이자 바로 입학 허가가 났다. 하지만 그는 입학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무조건 평양미술대학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그 과정에서 평양미술대학 학장과 만수대창작사의 최고 화가 등에게 편지도 썼다.

이런 행동들이 화근이 됐다. 대학은 당에서 보내주는 것인데 일개 개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사상투쟁회의에 회부돼 또 이런 일을 벌이면 출당을 시키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권 씨는 버티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북한에서 단식투쟁은 감옥에 끌려갈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단 선전부에서 일하면서 인정받은 공이 컸기에 간부들이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여단 선전부장 등은 “지금은 평양미술대학 폰트(추천권)가 전혀 나오지 않으니 대신 청진 2사범대학 미술학부로 보내주겠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988년 제대증을 받고, 청진에 갔다. 하지만 시험은 보지 않았다. 청진에서 시당 간부를 하고 있던 사촌형이 “김책제철소에 가서 1년만 일하면 그동안 평양미술대학 추천권을 받아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평양미술대학에 가고 싶었던 그는 사촌형의 제안을 받아들여 김책제철소 직관원으로 1년 동안 일했다. 

그러나 미술대학 폰트는 끝내 받지 못했다. 연령제한도 걸림돌이 됐다. 평양미술대학은 만 26세 이하만 입학을 시켰는데, 이미 그는 제한선을 넘은 것이다.

결국 그는 대안을 찾기로 했다. 그 결과 북한에서 ‘동방의 유일한 도자기 대학’이라고 선전하며 “외국 유학생까지 받겠다”고 선전하던 경성도자기단과대학을 선택했다.  당시 경성(주을)도자기가 외국에서 인정받으면서 경성도자기공장은 도자기연합기업소로 승격했다. 만수대창작사에서 공장에 내려와 그림을 그려 외화를 벌고 있었다. 

권 씨는 1989년 4년제 도자기공예미술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졸업하면 함경북도 미술창작사 공예단에 가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공예단 단장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졸업 시점이 다가오면서 그는 다시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미술창작사에서 인재들이 속절없이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

사람들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1995년부터 시작된 줄 알고 있다. 하지만 함경북도와 양강도 등 평양에서 먼 지역은 1980년대 말부터 이미 배급이 끊겼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온 장하남, 박천민 등 함북의 유명 예술가들이 배급을 받지 못한 채 집에서 숨을 거뒀을 정도다. 이들은 오직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장사를 할 줄 몰랐다.

2014년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려 갑니다’에 출연해 북한 실상을 증언하고 있는 권 씨.



● 노동당 소속 신문주필이 되다
졸업 후 그는 도 동약(한약)관리국에 들어가 약 상표를 그리는 일을 맡았다. 동약관리국엔 원자재로 쓰는 곡물이나 물약 등이 공급됐다. 이후 중학교 미술교원으로 발령받기도 했지만 가지 않았다. 중학교 교원도 당시엔 굶어죽기 쉬운 직업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기웃대다 마침내 정착한 곳은 2금속연합기업소 초급당 선전부 지도원 겸 신문주필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무려 460여 종에 달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급 기업소 이상 기관들은 모두 자체 신문을 보유했다. 한국으로 치면 사보와 비슷한 것이다. 2금속은 북한에서 제일 큰 건설연합기업소였다. 주로 금속공장을 건설하거나 보수하는 일을 했다. 산하에 작은 기업소를 43개나 거느린 대기업이다.

김일성은 2금속을 “나의 전방척후대”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로 2금속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제호는 ‘전방척후대’였다. 참고로 김책제철소 사내 신문은 ‘강철전선’이다.

권 씨의 업무는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발행부수는 43부에 불과했다. 종이가 부족한 탓에 각 기업소에 한 부씩 보내줄 물량만 찍은 것이다. 그마나 늘 종이가 모자랐다. 그래서 권 씨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길주펄프공장에 가서 용접봉 1㎏과 종이 1㎏을 바꾸어오는 것이었다.

신문주필로 그는 1997년까지 3년을 일했다. 그 기간은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와 겹친다.

권 씨는 북한의 최대 제철소인 김책제철소가 배급 중단 1주일 만에 용광로 가동이 중단되고, 평생을 노동당에 충성을 다할 것 같았던 간부들이 아프다고 핑계를 내고 퇴직한 뒤 장사에 나서는 일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노동당 말단 지도원인 권 씨도 배급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가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1970년대 청진시에서 최초로 ‘꽃사탕’이란 것을 만들어 팔고 ‘꽃떡집’이란 것도 운영했었다.

김일성이 ‘8월 3일 지시’라는 것을 내리고, 지방경공업을 발전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서둘러 소규모 경영형태의 부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개인 소유는 아니었지만, 운영을 맡고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6.25전쟁 참전군인 출신인 어머니는 ‘도 노병써클위원장’이란 감투도 쓰고 있었다. 참전군인들로 구성된 공연단인데, 어디에서도 무시하기 힘든 파워를 지닌 조직이었다. 어머니는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함경북도에서는 누구도 쉽게 시비를 걸기 어려운 광범위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1997년 함경북도 예술단에서 무대미술가로 일해달라는 제안이 왔다. 당시 도 예술단에선 ‘딸에게서 온 편지’라는 야심작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에서 미술가로 파견돼 온 권 씨의 군시절 지인이 “함경북도에 권효진이란 인재가 있는데 왜 데려다 쓰지 않냐”고 한 것이발단이 됐다.

권 씨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신문주필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도 예술단은 집 바로 앞이라 통근거리도 가깝고, 좋아하는 그림도 실컷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으로 공연을 나갈 기회도 있었다.

올해 1월 서울 도봉구에서 한 달간 열린 문화예술부 주최 ‘탈북 예술가의 삶’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들을 출품한 권씨가 자세를 잡고 있다.



● 국군포로를 찾아준 죄
절차를 거쳐 도 예술단으로 옮겨 권 씨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어 전국인민축전에 나갈 작품 심의위원으로 선정되며 술술 일이 풀리나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또다시 그에게 장난을 쳤다. 2금속 당위원회에서 권 씨가 무단결근을 하고 있다며 출당시키겠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자초지종을 살펴보니 당적이 넘어오지 않은 게 문제였다.

북한에선 직장을 옮기면 식량정지, 군사이동증, 조직이동증, 거주지 이동증 등 11개의 서류를 수정해야 한다. 이 가운데서 하나라도 누락되면 처벌이 내려진다. 특히 당적 이동은 11개 서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분류된다. 만약 직장에서 이직 희망자의 요청 승인을 거부하면 이직은 불가능하다.

권 씨도 그런 경우였다. 2금속 당위원회가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처벌이 불가피해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2금속에 가서 머리를 숙이기엔 권 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굶어죽는 마당에 노동당원이 다 뭐냐. 나는 가지 않을테니 니들 마음대로 해라.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왔는데, 이제부턴 나도 돈이나 벌 거야”라고 소리쳤다. 그 길로 그는 나진으로 옮겨갔다. 2년쯤 지나서 그는 당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당 조치도 받았다.

나진에서 그는 장사 수완을 발휘해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동해함대 군상관리소 지도원이란 명함을 파고 중국에 잣과 해산물 등을 팔았다. 돈이 쌓이자 200마력 어선 두 척을 빌렸다. 대학 등에서 갖고 있는 부업선으로, 연료가 없어 가동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권 씨는 배 소속 기관에 매달 연료 1톤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배를 빌린 뒤 해산물을 잡아 중국에 팔았고, 수만 달러라는 거금도 벌었다. 이 과정에 나진을 드나드는 조선족 상인들과도 인맥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분이 있던 조선족 상인에게서 “청진체신소에 가면 김송춘이란 사람이 있는데 나진까지 좀 데려와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수고료 2000달러에 선불도 500달러를 준다는 조건이었다.

위험 부담이 있었지만 무시하기엔 큰 돈이었다. 당시엔 청진과 나진 사이엔 전기철조망이 쳐 있고, 단속초소도 있어 사람들이 함부로 왕래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돈이 많은 권 씨는 단속초소를 매수한 상태인지라 사람 하나 데려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청진에서 수소문한 끝에 찾은 김송춘 씨는 굶어죽기 직전인 삐쩍 마른 노인이었다. 그는 인근 장마당에서 노인을 배불리 먹이고 좋은 옷도 사 입혔다. 이어 약속장소인 남산여관으로 데려다 주는 데 성공했고, 약속한 돈을 챙겼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은 일을 하며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 일은 그에게 큰 위기가 됐다. 얼마 뒤 친분이 있는 보안서 간부가 그에게 보위부에서 찾는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김송춘이 국군포로였다는 것. 그리고 조선족 상인은 무역도 하면서 동시에 국군포로도 찾아 한국과 연결시켜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권 씨는 국군포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조선족 상인을 감시하던 보위부는 그가 여관에 노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까지 사진을 찍어 갖고 있었다.

그는 큰일에 연루됐음을 직감했고, 순순히 보위부에 잡혀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벌었던 돈을 숨겨두고, 그 가운데 1만 달러만 배에 찬 뒤 평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평양에서 친구들을 만나 수습할 방법을 찾으며 몇 달을 보냈다. 그 기간 나진에는 “권효진이 30만 달러를 횡령하고 도주했으니 보는 즉시 신고하라”는 내용이 담긴 수배 전단이 사진과 함께 거리 곳곳에 붙었다.

도주생활은 사리원에서 막이 내렸다. 친구를 만나려 내려갔다가 그를 추적하던 보위부원들에게 잡힌 것이다. 1999년 말 그는 함경북도 보위부로 끌려갔다.

청진에 사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3년형 정도를 선고받고 모든 일이 끝날 줄로 알았다. 하지만 일이 꼬였고,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장사하면서 함께 연루됐던 고위급 간부 자식들이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지난해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캠핑카 전시회에 회사에서 제작한 차량을 출품한 권 씨.



● 사형판결을 받고 한 최후진술
1년여의 긴 수사 끝에 마침내 2001년 1월 17일 최종 재판이 열렸다. 중앙재판소에서 직접 판사가 내려왔다.

그는 형이 언도되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주요 죄명은 “국군포로를 빼내려고 내통한 죄, 노동당의 재산인 송이버섯을 몰래 판 죄, 당 자금을 횡령한 죄, 대외사업권한이 없이 외국인을 면담한 죄” 등이었다. 어느 것 하나 간단한 죄목이 아니었다. 외국인 면담죄만 봐도 ‘형법부칙 50조에 따라 장군님의 대외적 권위를 훼손한 죄’와 연결됐다.

판사는 죄명들을 줄줄이 나열한 뒤 “권효진에게 사형을 언도한다”고 선언한 뒤 의사봉을 세 번 내리쳤다. 당시 법정에 있던 어머니는 판사의 선고 소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형 판결 뒤 판사가 물었다. “피고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가?”

한참을 머뭇대던 권 씨는 입을 열었다. 사형까지 받았는데, 무슨 말이던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말들이 쏟아졌다.

“사실 지금까지 1년 넘게 구류돼 조사를 받으면서 각종 혐의에 대해 인정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저는 다 부인했습니다. 사실은 다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나진으로 가서 중국 사람들을 만난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신문주필로 긍정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다 옳다고 써왔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을 만나 꼭 알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너희도 사회주의를 하는데, 왜 우리만 굶어죽고 있냐. 너희는 어떻게 살고 있냐’ 이런 것을 묻고 싶었습니다….”

그의 진솔하지만 따끔한 현실 비판이 담긴 최후 진술을 들은 판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휴정을 선언한 뒤 다른 재판관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 때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던 어머니는 급하게 그들을 뒤따라갔다.

이후 15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 재판실 창문을 두드렸다. 어머니였다. 조금 전까지 혼절까지 하며 사색이 됐던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창문 밖에서 두 손바닥을 활짝 폈다가 다시 한 손바닥을 활짝 폈다. 15년형이란 뜻이었다. 어머니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도 불렀다.

권 씨는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 “세상 어느 어머니가 아들이 1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웃으면서 만세를 부릅니까. 재판이 끝난 뒤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어요. ‘내 너를 두 번 낳았다. 오늘 다시 태어났으니, 네가 돌아오는 날까지 내 절대 죽지 않고 기다리마.” 

재판정으로 돌아온 판사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그가 했던 말을 권 씨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형법 부칙 49조를 양정하여 국가 재산류 관련 형법 61조에 근거하여 15년 징역형에 처한다.” 형법 49조는 사형이고, 양정은 바꾼다는 뜻이다.

선고를 마친 뒤 판사는 그를 바라보며 “피소자, 마지막 말을 참 잘했어”라고 하더니 판결문을 닫고 재판정을 떠났다.

권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50세 중반쯤 돼 보이는 판사였는데, 지금도 궁금합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살려주려 마음먹었는지”라고 말했다.

2016년 유엔의 후원으로 서울 한남동에서 한달 동안 진행된 북한 인권 전시회. 인터넷에 퍼져있는 북한 인권 실상 관련 많은 그림들이 권 씨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직접 그린 것이다.



● 전거리교화소의 ‘불망산’
2001년 2월 5일 그는 전거리교화소에 입소했다. 북한의 공식명칭은 12호 교화소이다. 당시 전거리교화소는 800명 수용능력에 보통 1100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를 경비하고 지키는 보안원이 모두 240명이나 됐다.

권 씨는 교화소에 들어가자마자 특혜를 받아 ‘목공지령공’이란 직책을 얻었다. 교화반 중 임업반들에 생산 지령을 주고, 저녁에는 과제 수행을 판단하는 자리였다. 입소와 퇴소, 병보석, 사망자 등을 종합해 교화국에 보고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특혜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가족 전부가 매달려 동원한 각종 인맥과 뇌물이 있었다. 전거리는 함경북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청진의 가족들이 그를 쉽게 돌볼 수 있었다.

그는 특별대우를 받았고, 4년 뒤엔 교화소 총지령공이 됐다. 수감자 중 2인자에 해당하는 자리인데, 빨간 완장을 차고 다녔다. 당시 1인자인 전거리교화소 총반장은 나진시당 조직비서를 했던 사람이었다.

교화소 생활을 끔찍했고 매일 사람이 죽어나갔다. “총지령공이란 자리에 있으니 매일 몇 명이 들어오고, 몇 명이 나가는지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집계해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균 1100명이 수감돼 있었던 교화소에선 사람이 안 죽은 날이 없었습니다. 제일 적게 죽은 날이 2명이었고, 하루 평균 5~7명이 죽었습니다. 겨울에는 10명 이상씩 죽습니다.” 그는 만약 일반 재소자로 있었다면 자신도 2년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사망자 처리 과정은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사람이 죽으면 쌓아두었다가 불망산이란 곳에 가서 화장을 합니다. 전거리를 경험한 탈북민이 많지만 불망산은 말만 들었지 가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시체는 총지령공인 저와 수레꾼 4명, 식당 직원 2명, 위생원 2명만이 운반합니다. ”

“불망산의 화장은 철근 선반 위에 나무를 쌓아놓고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태웁니다. 선반 크기때문에 가로로 6구를 눕히고, 세로로 6구를 눕혀 모두 12명을 화장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 나무에 불을 붙이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아침에 가면 시체들이 모두 재가 됩니다. 그럼 빗자루로 그 재를 쓸어 주변에 버립니다. 무덤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화장하는 그 나무는 바로 죽은 사람들이 어제까지 산에서 끌어내려온 나무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거리에서 총지령원을 할 때 그가 화장 처리한 시신만 수천 명에 달한다.

2016년 가구제작을 하던 시절 뉴질랜드송으로 의자를 제작한 귄 씨.



● 한국에서 받은 깨달음
죄수 중에서도 그나마 간부를 한 덕에 권 씨는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다. 또 대사령 때마다 감형을 받아 15년 형이 6년으로 줄었다. 2007년 2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권 씨는 특별한 직업이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교화소 출소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북한을 뜨기로 결심한다. 오랜 준비 끝에 2008년 12월 탈북의 길에 올랐다. 북한에서 움직일 루트를 정밀하게 설계한 덕분에 오래 걸리지 않고 태국을 거쳐 2009년 2월 한국에 입국했다.

“인천공항에서 들어오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주필을 할 때 늘 썼던 말이 애국을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오면서 창 밖의 모든 것을 살펴보다가 저도 모르게 ‘애국은 한국이 하는구나’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특히 충격 받은 것은 도로 방음막이었다. “이게 진짜 국민을 위한 정책이지요. 도로 화단을 보나 산을 보나, 도로를 보나 모든 것들이 완벽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 치의 땅도 애국의 선상에서 애정 관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해 8월 하나원을 나와 그는 동대문구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만 나이로 48세였다.

“한국에 올 때 두 가지는 가서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서예나 그림을 그려 붓으로 먹고 살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영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는 집을 받고 다음날 인사동으로 향했다. 한국의 미술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로 마음속에서 붓을 내려놓았다.

“한국 미술과 북한 미술의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이건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구나. 선전화 위주의 북한 미술로는 여기서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날엔 경동시장에 가서 수산물 파는 알바 자리를 얻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어떻게 유통되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이후에도 이사짐 업체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북한 관련 전문 인터넷 신문 기자로 채용돼 2년을 일했다. 또 북한인권단체 실장으로 1년을 일하는 등 강연과 인권 활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전거리교화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려 유엔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득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다. “여기 와서 계속 소위 ‘운동권’ 탈북민들과 어울려 다녔더군요. 단체 일을 해봐야 월급이 적기 때문에 그냥 근근이 먹고 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나라에 와서 계속 요구만 하면서 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기술을 익혀 자립해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탈북민은 북한에서 출신성분 등으로 인해 도무지 잘 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출신성분을 보지 않는 한국에선 왜 잘 살지 못합니까. 정부에 탈북민 정착지원이 부족하다고 계속 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받아주는 측의 입장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닌데, 계속 요구만 할 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술을 익혀 능력으로 인정받고, 그걸로 탈북민의 편견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때 이전에 했던 모든 일들과 관계를 끊고, 그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소양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그는 기술을 익혀 자리를 잡은 삶이 진정한 탈북민의 정착이라고 생각한다.



● 캠핑카로 다시 그린 인생
무엇을 제일 잘할지 생각해봤다. 북에서 공예미술과를 다니면서 목공일도 해본 경험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재주로 하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여러 곳을 알아보다 취직한 곳이 경남의 한 작은 목공장(가구공장)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가구들을 살펴보며 창의성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2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 마침내 그가 만든 가구들을 경남의 제일 큰 가구점에 납품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열심히 하면 보상이 따를 것이란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목공장의 매출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익 배분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2년 만에 첫 일을 그만두었다.

두 번째 도전으로 그는 캠핑카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앞으로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캠핑카 수요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벤츠를 개조해 캠핑카로 만드는 회사에 찾아가 무작정 취직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사장은 그를 아래위로 살펴보더니 “최저시급을 줄 테니 해 보겠냐”고 했다. 일주일 동안 그가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사장이 다시 그를 불렀다.

“일을 참 잘하시네요. 월급을 올려드릴게요.”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서 열심히 합니다.”

그곳에서 많은 기술을 익혔다. 그런데 1년 뒤 공장이 멀리 이전하게 됐다. 이사까지 하면서 따라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해 결국 그 공장을 그만두었다.

다시 찾은 직장은 경기 광주에 있는 캠핑카 제작업체 ‘캠핑대장 팔라스’였다. 유경험자인 그는 이미 경력 기술자가 돼 있었다.

4년이 지난 현재 그는 회사의 제작반장이다.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관련 특허도 여러 건을 갖고 있다.

“제가 일할 때 캠핑카의 영역은 스타렉스 이상급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저는 승용차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란하게 장비를 많이 갖출 수도 있지만, 피곤하면 인근 숲 속에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캠핑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닝까지 차박 침상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개조한 캠핑카는 450대 정도 됩니다.”

이제 그는 기술로 이 사회에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형님, 이것 와서 좀 해주세요’하는 친구들이 다 한국 친구들입니다. 기술로 인정받으니 누가 찾을 때마다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일을 하는 틈틈이 글도 쓴다. 탈북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지내다보니 올해 10월 국제펜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으로 추대 받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신망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통일이 되면 그는 캠핑카를 몰고 북에 가고 싶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이 호화로운 집, 비싼 차 이런 경쟁을 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비싼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북의 친구들에게 대한민국 홍보대사가 되고도 싶다. “여력이 된다면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고향 친구들에게 내가 보고 느낀 대한민국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껍데기만 볼 겁니다. 저는 이 사회에서 15년을 살면서 속살까지 봤습니다. 그 속살을 가르치며 빨리 여기로 들어오라 말할 겁니다. 하하….”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