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전 독일 총리, 회고록 출간… 우크라戰 발발 전 평화 위한 노력 푸틴 등 각국 정상 외교 뒷이야기… 트럼프에겐 노골적 혹평 내리기도 클린스만 감독과의 일화 인상적… 인간적 면모 엿보는 재미도 쏠쏠 ◇자유/앙겔라 메르켈 지음·박종대 옮김/768쪽·3만8000원·한길사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맞아 2018년 11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평화포럼 개막식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왼쪽부터)가 참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국제 협력뿐만 아니라 유럽의 평화 노력까지 다시 의문시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파리=AP 뉴시스
2015년 2월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을 찾았다. 2014년 2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 내 군사 분쟁을 끝내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저녁 식사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두 정상에게 각각 러시아어-독일어, 러시아어-프랑스어로 된 고대 군사학 사전을 선물했다. 푸틴은 메르켈이 며칠 뒤 미국에 방문한다는 걸 알고 러시아어-영어로 된 사전도 하나 더 전하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메르켈은 “푸틴이 비록 우릴 만나고 있지만, 실은 미국만 대등한 협상 파트너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했다”고 떠올렸다.
국제 외교무대의 막전막후가 담긴 메르켈 전 총리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전 세계 30개 언어로 출간된 이번 회고록엔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메르켈이 16년 동안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겪은 일화가 빼곡히 담겼다. 불과 3년 전까지 세계 외교무대에서 각국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의 이야기인 만큼 출간 전부터 외신들도 들썩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메르켈은 “부동산 개발업자의 눈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이라며 “협력을 통한 공동 번영이라는 개념 자체를 믿지 않는다”고 평했다. 또 트럼프가 푸틴 같은 독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기록도 남겼다. 퇴임 전까지 메르켈과 트럼프는 불편한 관계였다.
메르켈은 총리로 있으면서 중동지역 난민 수용을 적극 옹호했다. 2015년 100만 명 이상의 중동, 아프리카 지역 난민을 독일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회고록에서 “독일 내 인력 부족으로 합법적인 이주는 필수”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이런 방침에 대해 일각에선 유럽 내 극우 정당의 약진과 치안 불안을 야기했다는 시각을 제기한다. 메르켈은 2016년 독일 내 이슬람 세력의 테러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자신의 난민 정책을 믿고 따라준 지지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과의 일화도 흥미롭다. 그가 총리에 오른 지 몇 달 만에 2006년 독일 월드컵이 열렸다. 당시 독일 축구 대표팀 사령탑이던 클린스만은 그때도 12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있는 가족을 자주 찾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다’는 비판을 받았다. 축구에 광적인 독일 민심을 생각할 때 메르켈에게도 대표팀 성적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을 터. 하지만 메르켈은 “그에게는 가족의 품이 필요한 듯했다”고 두둔했다. 결과는 월드컵 3위. 메르켈은 “2006년 여름은 모든 게 완벽했고 ‘여름 동화’로 기록됐다”고 했다.
회고록 제목 ‘자유’에 대해선 “나의 한계를 알아내고 한계까지 나아가는 것”이라며 “은퇴 후에도 배움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썼다. 중국 외 한국, 일본 등의 내용이 적은 것은 아쉽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