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련 논설위원
정치 투쟁용 탄핵, 무책임한 계파 싸움, 기획 방탄, 가족의 국정 개입 뉴스가 나라를 뒤덮고 있다. 하나하나가 충격적인데, 태연하게 반복되는 것이 놀랍다. 누구는 1987년 헌법이 소명을 다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보는 개헌을 주문한다. 다른 누구는 선출직과 고위 공직을 노리는 이들 중 상당수가 평균 한국인에 못 미친다면서 사람을 바꾸는 ‘정치 교체’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질문: 누가 정치를 해야 하나
대개의 유권자들은 알 만큼 알게 됐다. 정당의 선출직 공천이 공공선 인재를 찾는 것 말고도 사적 목적이 개입된다는 것을. 공천 결정권자와 그 대리인들은 눈 딱 감고 나를 도울 내 편을 먼저 찾곤 한다는 것을. 김영선 전 의원이 어떻게 공천받았는지도 대충 드러났고, 박용진 의원을 배제하기 위한 3차례 경선도 많은 걸 말해줬다. 임명직이라고 다르지 않다. “(질문이) 무례하다”는 정무수석, “대통령과 친 골프는 로또”라는 국방장관이 등장했다. 월광소나타 피아노 연주를 한 뒤 청와대 대변인에 발탁되는 일도 있었으니 보수-진보 구분과 무관한 일이다.
공공 리더의 기준이 하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의 경험은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나라 안에서는 소련 붕괴의 책임자로 욕먹지만, 밖에서는 사회 개혁과 정치적 개방을 ‘시도’하면서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고르바초프는 억압적 체제 내 엘리트였다. 40대 후반에 농업 분야 총책임자(서기)가 됐고, 최연소 공산당 정치국원이 됐다. 브레즈네프라는 어둠의 서기장을 공개된 자리에서 칭찬했고, 아부했다는 기록이 넘친다. 그랬으니 이견 없이 체르넨코의 후임으로 1985년 봄 1인자에 올랐을 것이다. 겉으론 그랬지만, 고르바초프의 마음에선 농업을 책임지면서 갖게 된 소련 변혁의 꿈이 커가고 있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자신이 훗날 외교장관으로 발탁한 친구 셰바르드나제와 흑해 휴양지에서 겨울 휴가를 보냈다. 그때 둘은 긴 소나무 숲 산책로를 걸으며 “농민의 추가 노력으로 더 생산한 몫은 인센티브로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소련 농업과 체제에 미래는 없다”는 대화를 나눴다. 반역에 가까운 토로였다. 그대로만 가면 미래가 창창한 둘이었지만, 변화를 통해 조국을 올바른 궤도에 올리고 싶어 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자기를 잊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 모먼트’라 불릴 만했다.
반대자 비판만으로는 ‘정치 부적격’
당신이 정치인이라면 지난 몇 년 사이에 정치적 동지들과 무엇을 주로 대화했는지 되돌아 봄직하다. 다음 공천 가능성, 상대 정파 험담, 상대 정당 흉보기에 머물렀다면 어쩌면 당신의 시대는 저물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