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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을 키운 8할은 돌이었더라[여행스케치]

입력 | 2024-11-30 01:40:00


나는 돌이로소이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싱싱한 흙내, 짭조름한 갯내 물씬한 전남 장흥(長興)에서 나는 돌이로소이다.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 내가 주역입네 할 생각은 없소. 다만 그동안 가려져 있던 나를 슬그머니 드러내 보려 할 뿐이오. 세계 전체 고인돌의 40%가량이 모인 한반도에서도 장흥에 고인돌이 가장 많이 있다고 하지 않더이까. 그럴진대 이 정도 뽐냄이야 한 번쯤 눈감아 줘도 되지 않으리오.

● 장흥 역사와 신화를 새긴 천관산

나는 돌이로소이다. 천자(天子)의 면류관에 달린 주옥(珠玉)인지, 옥황상제가 살짝 내려놓은 왕관인지, 기기묘묘한 모습에 천관(天冠)이라 불린다오. 누구는 “대꼬챙이처럼 날캄한(날카로운·전남 방언) 바위들로 촘촘히 들어박혀” 있다고 하고, 누구는 제주도 해변 주상절리를 갖다 놓은 것 같다고 하고, 누구는 사자며 거북이며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을 갖다 대 찬탄하더이다.

닭봉(峯)이어도 좋고, 꼭대기 연대봉(烟臺峯)이어도 좋고, 너른 억새밭이어도 좋소. 그곳까지 숨 가쁘게 이어지는 된비알(험한 비탈)을 오르다 보면 시루떡 혹은 원반 두께로 쪼개진 평평한 돌들이 여기저기 뭉텅뭉텅 보일 테요. 그 쓰임은 뒤에 알려 드리리다.

전남 장흥 천관산 닭봉에서 바라본 정남진. 서울 광화문 정남쪽에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정남진과 함께 득량만을 품은 남해와 다른 지역 섬들이 보인다. 맑은 날에는 한라산이 보인다고 한다. GNC21 제공

천관은 남녘 땅 끝머리에 있소. 그렇게 올라 남쪽을 향하면 정남진(正南鎭)과 그 너머 득량만(得糧灣)을 품은 남해, 그리고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오. 그 풍경을 설(說)하는 법을 나는 모르외다. 나를 밟고 선 당신 몫이라오. 이곳 시인 이대흠의 시구(詩句)대로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기’듯 나는 장흥의 청사(靑史)와 신화를 새긴 돌이로소이다. 참, 정남진은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오.

나는 돌이로소이다. 전국 시인과 소설가 54명의 글을 품은 돌로 쌓은 ‘문탑(文塔)’이로소이다. 장흥은 문재(文才)가 뛰어나다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 시인 위선환 이대흠 김영남, 아동문학가 김녹촌 등이 태어났소. 등단 작가만 100명이 넘소. “순천 가서 인물 자랑 말고, 벌교서 주먹 자랑 말고, 여수서 돈 자랑 말라”고 했다는데 “장흥 와서 글 자랑하지 말 일”이오.

이 작가들의 뮤즈(muse)가 ‘큰 산’이라오. 천관산을 일컫는다 하더이다. 이 산 남쪽 자락에 이들을 기리는 천관문학관이 있고, 탑산사(塔山寺) 가는 골짜기 초입에 천관산 문학공원이 있다오. 그곳에 이르는 비탈길 가장자리로 돌탑이 700여 기 줄지어 서 있소이다. 시루떡 두께로 쪼개진 평평한 돌들이 포개져 탑을 이룬다오. 인근 대덕읍 주민들이 쌓았다고 하니 갸륵하오.

문학공원에는 작가 54명이 보낸 시구나 문장이 54개의 돌에 새겨져 있다오. 노벨 문학상을 탄 한강의 부친 한승원 문학비(碑)에는 이렇게 적혀 있소. ‘이 근동의 모든 학교 교가 속에 이 산이 들어와 있듯이 내 육체와 영혼 속에 이 우람한 산이 들어와 있다.’

문화재생사업이 한창인 옛 장흥교도소 수감동 내부.

나는 돌이로소이다. 옛 장흥교도소 돌담이로소이다. 내 품 안에서 2015년까지 죄지은 사람들이 살았소. 혹자는 갱생하고 혹자는 되돌아왔다오. 1980년대 초반 제5공화국 정부를 뒤흔든 사기 사건 주범 이철희 장영자 부부도 여기서 복역했다오. 이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개방된 옛 실물 교도소라 하더이다. ‘더 글로리’ 연진이가 들어갔던 철문이 여기였소.

이곳에서는 ‘빠삐용 집(ZIP)’이라는 이름의 문화재생사업이 한창이오. 자유를 갈망해 깎아지른 절벽 밑 바다로 뛰어든 빠삐용처럼 내 안에서 ‘새로 살고 서로 사는’ 문화 해방구가 만들어진다고 하오. 옛 민원봉사실은 장흥교도소 아카이브로, 직원식당은 교정역사전시관으로, 여성 미결수 사동은 ‘글 감옥’이라는 시나리오 작가 숙소 등으로 바뀐다고 하더이다.

● 화해의 장소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나는 돌이로소이다. 탐관오리 학정(虐政)에 분연히 일어선 동학 농민의 마지막 죽음을 지켜본 돌산, 석대산(石臺山)이로소이다.

1895년 1월 초 동학군 최후의 격전장이 내 앞 석대들이었소. 마지막 남은 동학 교도 3만여 명이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했다오.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화승총과 죽창으로 맞섰으니 패배는 자명했다오. 내 자락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위 장흥공설운동장 터에서만 무연고 전사자 시신이 1600여 구 발굴됐소.

쓰라린 현장이었지만 100년이 훌쩍 지나 화해의 장이 되는 것을 보았다오. 동학군과 싸우다 숨진 장흥부사 박헌양을 비롯해 96명 장졸의 후손과 동학군 후손들이 함께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제막했소. 흡족했다오.

토성을 볼 수 있는 정남진 천문과학관 반사망원경.

나는 돌이로소이다. 토성이로소이다. 밤하늘 은하수 서쪽서 빛나던 베가(직녀성)보다 장흥에 훨씬 가까운 돌이로소이다. 베가는 25광년 떨어져 있지만 나는 빛으로 1시간 10분 거리요. ‘토성이 장흥과 무슨 관계라고…’ 의아한 이 적지 않으리오만 장흥 진산(鎭山)인 억불산(億佛山) 정남진 천문과학관에 가면 알게 되오. 주관측실에서 800mm 리치크레티앵 반사망원경으로 나를 보시구려. 노란 나를 둘러싼 선명한 띠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할 터이니.

장흥 신풍생태습지공원. 장흥댐이 들어서며 697가구가 물에 잠겼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남겼다.

나는 돌이로소이다. 정남진 편백나무 숲을 내려다보는 억불산 며느리바위로소이다. 며느리바위는 남편 찾아 아이 업고 길 떠나던 며느리가 시아버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다 돌이 됐다는 설화가 전하오. 내 다른 이름은 억불이오. 억은 만민을 뜻하니, 억불은 모든 이를 구제하는 부처, 미륵불이오. 한승원은 나를 ‘피플 붓다’라는 소설로 만들기도 했소.

뭇사람 마음에 평강을 주기 위해 조성한 숲이 바로 이 편백나무 숲이라오. 이름은 약간 촌스러운 ‘편백숲 우드랜드’요. 누구는 “모든 숲은 태초를 품고 있다”고 했는데 편백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어떤 신성함을 느낄 수 있다 하더이다.

나는 돌이로소이다. 설화 속 ‘바위 배’로소이다.

장흥 정남진 통일기원탑(전망대). 지상 46m 높이에서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 보이는 섬이 돌의도다.

장흥 앞바다 득량만을 내다보며 선 지상 46m 정남진 전망대(통일기원탑)에서는 많은 섬이 보이오. 가장 가까운 섬은,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붙어 버린 돌의도(突衣島)라오.

이 섬에 약 1200년 전 중국 절강성 소흥부(紹興府)에서 전란을 피해 임호(任顥)라는 송나라 관리 가족이 닿았소. 그들이 타고 온 배가 바위로 만든 배였다 하더이다. 그 후손이 고려 인종 비(妃) 공예태후라오. 공예태후는 의종 명종 신종의 어머니였소. 인종이 ‘길이길이 흥하라’며 장흥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하오.

산과 바다가 땅으로 이어지는 장흥은 산에서, 바다에서, 땅에서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주는 고장이라오. 산에서 표고버섯, 땅에서 소고기, 바다에서 키조개 패주(貝柱·조개관자)를 내주니 ‘장흥 삼합’이라는 별미가 된다오. 장흥에는 소 머릿수가 인구보다 많다고도 했소.

미당(未堂)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더이다. 그러나 이쯤 되면 장흥을 키운 것은 8할이 돌이었음을 알게 되지 않았으리오.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에서 ‘아마도 변티 아닐 ᄉᆞᆫ 바회 뿐인가 ᄒᆞ 노라(아마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라고 읊었소. 그렇소. 나는 돌이로소이다.



장흥=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