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주민 40만 명에 의료 혜택 준 공로로 올해 아산상 대상 수상… “우간다에 간 게 일평생 가장 잘한 일”
“시계와 라디오를 고치며 살아온 우간다 한 주민이 백내장으로 앞을 거의 보지 못했어요. 빛만 겨우 감지할 수 있는 상태였죠. 한국에서는 백내장 증상이 조금만 나타나도 바로 병원에 가 수술을 받지만, 우간다 사람들은 의료 환경이 열악해 앞이 하나도 안 보일 때까지 수술을 못 합니다. 수술 시간이 30분이 채 안 걸리는 간단한 수술인데도 말이죠. 이 환자는 저와 제 아내의 무료 수술로 시력을 회복해 생업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저희를 만날 때마다 고맙다며 닭, 오리, 고구마를 줍니다.”
임현석 베데스다 메디컬센터 원장(59)이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진료한 한 환자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다. 임 원장은 2000년 6월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 가 2002년 1월 베데스다 메디컬센터의 전신인 베데스다 클리닉을 세우고 지금까지 의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임 원장은 24년간 우간다 주민 40만 명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36회 아산상 대상을 받았다. 11월 25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고자 잠시 한국에 들른 임 원장을 26일 오전 서울 구로구 한 호텔에서 만났다.
아내·자녀들과 우간다로
임현석 베데스다 메디컬센터 원장(왼쪽)이 2005년 7월 18일 우간다 빈민 지역에서 어린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 제공]
“제가 대학에 갈 당시 의대생은 다들 슈바이처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했어요. 돈을 잘 벌려고 의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임 원장은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선발하는 ‘정부 파견 의사’(정부파견의)가 돼 아프리카에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정부파견의 모집이 끊겨버렸다. 1999년 2월 전문의 자격을 딴 임 원장은 동아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됐다. 임 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대학병원에서 연구실을 주고 자유 시간도 많이 줘 좋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안정적인 의사의 삶이었다.
하지만 임 원장은 안정된 생활 속에서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편안한 현실에 안주해 꿈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었다.
“대학병원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는 세상 끝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살겠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그해 8월 교회 수련회에서 유덕종 교수의 아내를 만났다. 유 교수는 KOICA 1기 정부파견의로 1992년부터 우간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임 원장은 유 교수의 아내로부터 “우간다에 병원 설립을 위한 후원금이 모였는데 그 사업을 맡아 줄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 원장은 이 사업을 맡기로 하고 곧장 동아대병원에 사직서를 냈다. 1년여 간 준비를 거쳐 2000년 6월 임 원장은 우간다에 첫발을 디뎠다. 의대 동기인 아내와 초교 1학년 딸, 유치원생 아들과 함께였다.
임 원장은 우간다에 가면 곧장 병원 문을 열고 의료 활동을 시작할 줄 알았다. 1년 전 교회 선교사들을 우간다로 보내 병원 설립 준비를 맡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 원장이 우간다에서 마주한 현실은 기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병원 개원은 고사하고 병원을 지을 땅조차 없는 상태였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어 국제우편으로 소통하던 시절이라 우간다 상황을 제대로 몰랐던 거죠. 우간다에 가서 600평형대 땅부터 샀습니다. 그다음 건물 자재를 사고 예상치도 못한 건축공사 감독 일을 시작했죠.”
임현석 베데스다 메디컬센터 원장(가운데)이 2004년 5월 27일 우간다 빈민 지역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 제공]
“병원을 짓는 데 1년가량 걸렸습니다. 건물 앞에 정글처럼 자란 나무를 도끼로 일일이 잘라냈어요. 인부들이 일도 열심히 안 해서 만날 싸웠고요. 우간다 정부의 병원 설립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직원이 자꾸 내일 다시 오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 우간다는 부정부패가 심해서 일을 빨리 처리하려면 급행료를 내야 했습니다. 의사로서 가운을 입고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데 맨날 공사장 인부들과 싸우고만 있으니 회의가 들었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우간다가 치안이 안 좋아요. 병원 건물을 산 바로 다음 날 밤에 도둑이 건물 문을 떼 가려고 했습니다. 자고 있는데 강도가 들어 경비원이 총을 쏴 쫓아낸 적도 있고요. 지금도 병원 주변에 총을 든 경비원을 고용하고 있어요. 경비원이 밤에는 근무를 제대로 안 하고 잠을 자서 강도를 쫓을 큰 개를 풀어둡니다. 새벽에 개들이 너무 조용하면 독살당했나 하는 걱정이 들어 잠을 못 자요.”
임현석 베데스다 메디컬센터 원장이 2008년 5월 19일 우간다 빈민 지역에서 아이를 진찰하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 제공]
임 원장은 후배 의사들에게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면 우간다로 오라고 조언했다.
“우간다 빈민 지역에 진료를 보러 가면 주민들이 꽃을 뿌리면서 환대해요. 제가 대단한 의료 장비를 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서 분에 넘치는 환대가 미안할 정도죠. 뇌전증, 뇌성마비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아이가 제가 처방한 약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저와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게 됐을 때가 가장 기뻤습니다.”
우간다에서 살며 가장 힘든 부분은 몸이 피곤한 진료도, 우간다의 나쁜 치안도 아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다.
“맏아들이 미국 대학에 다닐 때 난치병인 크론병(염증성 장질환)을 앓았어요. 저와 아내는 우간다에서 바삐 일하느라 곁에 있어 주지 못했는데 그게 가슴 아프죠.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우간다로 따라와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케냐에 있는 학교에 다니느라 부모와도 떨어져 지냈어요. 지금은 엄마 아빠를 이해한다고 말해줘 고마울 따름입니다. 첫째 딸은 간호사, 둘째 아들은 물리치료사이고 우간다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은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봉사의 피가 흐르나 봅니다.”
임 원장이 운영하는 베데스다 메디컬센터에서 나오는 수입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 임 원장 가족은 차도 없고 집도 없어 극빈 가정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임 원장은 우간다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가 육십 평생 살면서 가장 잘한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의대를 가 의사가 된 것, 둘째는 아내를 만난 것, 셋째는 우간다에 간 것입니다.”
임 원장은 이날 오후 인터뷰를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갔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67호에 실렸습니다.〉
임경진 출판국 기자 zz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