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망부석을 달리 해석하면 신라 눌지왕의 동생 구하려… 신하 박제상, 日서 고문끝 숨져 “기다리던 아내는 망부석 돼”… 그 돌은 충성심-절개보다는 화해 어려운 가치의 충돌로… 희생된 인간의 참담함 상징
신라 눌지왕의 신하 박제상은 일본에 붙잡힌 왕의 아우를 구하다 죽는다. 구전설화에 따르면 박제상의 아내는 망부석으로 변했다. 아내가 자신의 참담함을 정말 돌로 남겼다면, 그 돌은 “바르게 살자”(오른쪽 아래 사진)처럼 명랑하지 않고, 겸재 정선의 ‘망부석’ 그림(왼쪽 사진)이나 안젤름 키퍼의 ‘정복되지 않는 태양’ 그림(오른쪽 위 사진)처럼 어둡고 침울할 것이다. 사진 출처 겸재정선미술관·Finestre sull’Arte 홈페이지·김영민 교수 제공
《한국인이라면 거의 다 박제상 이야기를 알고 있다. 신라 눌지왕은 자기 동생들이 외국의 볼모로 잡혀 있어 마음이 괴롭다. 이에 신하 박제상은 왕명을 받들어 왕의 아우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 마침내 왕의 아우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정작 본인은 붙잡혀 고문 끝에 죽는다. 달아오른 석쇠 위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지킨 가톨릭 성인 라우렌시오처럼 박제상은 뜨거운 철판 위에서도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굽히지 않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 유명한 박제상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는 것은 물론 다양한 구전설화를 통해서도 전해 온다. 나라에 충성하는 이야기이니 그것이 국정 교과서에 실린 것도 이상하지 않다. 박제상이 ‘왜국’에서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의 한국 사회와도 호응한다. 그런데 박제상 이야기의 원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충신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떠나 외국에서 남편이 죽어버리면 아내 마음이 어떨까. 사이가 나쁜 부부라면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아무리 나라에 충성하는 일이라고 해도 마음이 기껍지 않을 것이다. 황산벌 결전에 나서는 백제의 계백 장군은 아내의 목을 베고 출전했지만 정작 목이 베인 계백 장군의 아내 마음이 기꺼웠는지는 알 수 없다. 박제상 부인도 나름대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편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정신이 나갔다. 집에도 안 들르고 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박제상 부인은 바닷가로 냅다 쫓아온다. 끝내 따라잡지 못하자, 모래사장 위에 널브러져 오랫동안 울부짖었다(沙上放臥長號). 그럴 만하지 않은가. 왜 국가는 멀쩡한 가정을 이처럼 파괴한단 말인가? 나랏일이니 동의해야 한다고? 말이 나랏일이지, 눌지왕이 자기 동생 보고 싶어 해서 생긴 사달이 아닌가. 자기 가족 그리움을 알면, 남의 가족의 그리움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 국가는 박제상의 아내에게 보상한다(報之). 박제상의 아내에게 국대부인(國大夫人)의 명예를 준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동생이 돌아오자 왕은 6부 관리들을 시켜 멀리 나아가 맞이하게 하고, 동생을 만나자 손을 부여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 모여 술을 늘어놓고 자리를 마련하고 극도로 즐겼다. 왕 스스로 가무를 지어 그 기분을 표현했는데, 지금 향악(鄕樂)의 우식곡(憂息曲)이 바로 그것이다(初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之 及見 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 鄕樂憂息曲 是也).” 이게 끝이다. 국왕이 동생을 찾아 극도로 즐거워했다니, 이거야말로 국가 차원의 해피엔딩이 아닌가. 국왕의 동생 찾기 과정에서 남편을 잃은 박제상 부인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덜 국가 위주의 문헌인 ‘삼국유사’의 마무리는 다르다. 왕의 기분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내는 게 아니라 박제상 아내의 기분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낸다. 박제상의 아내는 국가 포상을 받고 기분이 좋아졌나. 국대부인이 되어 기분이 흐뭇했나. 그럴 리가. 그깟 명예가 다 무슨 소용. 남편은 이제 곁에 없는데. 박제상의 아내는 치술령(鵄述嶺) 위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버린다(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구전설화에 따르면, 박제상 아내는 망부석으로 변했고, 그 망부석은 박제상 아내의 대단한 절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곤 했다. 그 망부석이 절개를 나타낸다면, 그 돌은 오늘날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바르게 살자” 돌덩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둘 다 사회적 윤리를 고취하여 결국 국가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돌덩이인 것이다. 망부석이 과연 그런 절개를 나타내는 것일까.
박제상의 부인이 자신의 참담함을 정말 돌로 남겼다면, 그 돌은 “바르게 살자”처럼 명랑(?)하지 않고,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안젤름 키퍼의 그림처럼 어둡고 침울할 것이다. 그 돌은 충성심이나 절개보다는 화해하기 어려운 가치의 충돌, 그리고 그 충돌에서 희생된 인간을 상징할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