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 日 저성장, 인구감소-경쟁력 약화 탓… 저성장 원인 디플레이션 진단 잘못돼 아베노믹스, 日 경제 해결책 잘못 짚어… 韓, 저출산 고령화 문제 조기 대처해야 닮은점 많은 韓日, 고민 노력 공유해야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 그는 “추세적인 잠재 성장률 하락은 금융완화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며 기업 경쟁력 강화, 저출산 고령화 대책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사히신문 제공
《1987년 주요 7개국(G7) 중 1인당 국내총생산(GDP) 1위는 일본(2만1112달러)이었다. 36년이 지난 지난해, 일본은 G7 회원국 중 1인당 GDP가 최하위(3만3811달러)로 내려앉았다. 금융 위기와 경기 둔화, 저출산 고령화, 생산성 저하…. 겉으론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헤어나오기 어려운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 경제는 여전히 반등 모멘텀을 잡지 못하고 있다.
1%대 저성장이 고착화될 것이란 우려 속에 한국 경제도 ‘일본화(日本化·Japanification)’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의 활력 저하로 세대 간 갈등과 비관론이 확산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이제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GDP(3만5562달러)가 일본을 따라잡았다지만, 이대로 저성장이 굳어지면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제, 사회적 쇠퇴가 진행될 것이라는 우울한 관측도 나온다.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전 일본은행 총재(재임 2008∼2013년)는 일본 경제 거품과 붕괴, 재도약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목격하며 경제 정책에 참여한 ‘잃어버린 30년’의 산증인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저서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저성장으로 접어든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일본 성장률 저하는 인구 감소와 일본 기업 경쟁력 약화가 근본 원인이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탓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 부진도 경기 순환적 침체인지, 구조적 문제인지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에게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 저성장에 들어서는 한국 경제에 주는 시사점 등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달 29일 화상 인터뷰와 이를 보충하는 서면 인터뷰도 진행했다.》
―일본 장기 불황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나.
“1990년대 이후 일본 성장률 하락은 크게 3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거품 경제가 붕괴했고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생산가능인구(15∼65세) 감소, 글로벌화와 기술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었다. 버블 붕괴와 인구 감소에 따른 저성장은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에는 쓰여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잃어버린 30년’ ‘디플레이션에 빠진 일본’ 같은 서구의 오해가 글로벌 금융위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등에 대한 대응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이 있다.
“일본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저성장 원인이 물가 하락, 즉 디플레이션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이 진단이 옳다면 중앙은행은 디플레이션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판단되면 공격적 금융완화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해외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런 처방이 나왔다.
―일본은 대담한 통화정책, 기동적 재정정책, 거시적 구조개혁을 앞세운 아베노믹스에 나섰다. 어느덧 12년이 됐다.
“아베노믹스라고 표현했지만, 내용은 대규모 금융완화뿐이었다. (결과를 보면)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성장률도 상승하지 않았다. 일본 경제가 직면한 문제와 해결책을 근본적으로 잘못 설정했다. 일본 전체에 필요한 과제 해결을 위해 에너지를 썼어야 했는데도, 에너지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한다. 장대한 실험 결과 이제는 디플레이션이 저성장 원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줄었다. 그 대신 인구와 생산성 증가율 상승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일본의 지난해 경제 성장률은 1.9%였고, 올해도 플러스 성장 중이다. 물가 상승률도 2%대다. 이 정도면 ‘잃어버린 30년’은 끝난 것 아닌가.
“아직 그렇게 판단되지 않는다. 설령 임금과 물가가 2%씩 오른다고 해도 실질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국민들이 더 부유해진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생산성 상승이다. 일본에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안 보인다.”
―일본 정부는 최근 수년간 최저임금을 크게 올리고 기업에도 임금 인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임금은 노동 시장의 수요 공급으로 결정된다. 정부 압력이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결국 중요한 건 생산성이다. 생산성 성장을 웃도는 임금 인상은 오래가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일손 부족 현상이 심각한 일본에서 (낮은 수준조차) 임금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익성이 낮다는 뜻이다. 생산성이 낮은 기업이 높은 임금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상황에 따라 파산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생산성 낮은 기업이 퇴출되고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생겨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한국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고통스러운 구조개혁 속도 차이가 (한국과 일본이 다른 길을 간)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지금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장기 고용 제도가 지속되고 있는데, 고용 안정 측면에서 보호받는 노동자들에겐 긍정적이지만 경제 변화에 적응하고 노동력을 재분배하는 의미로는 부정적이다. 이런 게 일본 성장률 하락 요인이 됐다. 일본에서는 2010년대 초반 삼성과 경쟁하던 전기 제조업체들이 경쟁력 저하는 엔고 탓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실제로 엔화가 약세로 돌아섰음에도 일본 전자업체 경쟁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 기업 경쟁력 약화가 근본적 원인이었다.”
―이제는 한국이 장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동산 가격 상승 및 가계부채를 감안해 기준금리를 쉽게 낮추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과, 고령화 및 재정적자 확대 우려를 고려해 완화적 통화 정책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시각이 맞선다.
“추세적 잠재 성장률 하락 문제는 금융 완화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금융 시스템이 불안해지면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현 부채 증가 상황과 추세를 살피면서 (이를 감당할) 충분한 체력을 갖추고 있는지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이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잠재 성장률 둔화에 관심을 둬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일본 경제 문제점 및 해결책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IMF 보고서를 직접 읽어보지 못했다. 한국에 그런 논의가 있다면 일본이 직면한 상황, 특히 내가 일본은행 총재 시절 경험했던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일본 경제가 침체하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를 두고 일본은행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고 큰 비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인가.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원인이 어쨌든 간에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금융 긴축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금융 시스템이 불안정해졌을 때 ‘최후의 대부자’로서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릴 순 없다. 문제는 잠재 성장률 저하와 경기 순환적 침체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막연하게 경기가 나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와 같은 고도 경제성장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는 걸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중앙은행이 대응하겠다고 나서면 결국 영원히 금융완화를 지속하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한일 양국 공통 과제 중 하나가 저출산이다. 특히 한국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 문제를 경험하고 있지만, 일본 역시 충분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구 감소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조기에 대처하라’는 것이다. 사회적 관행을 재검토하는 것도 중요하다. 인구 감소는 종합적인 사회 문제 축소판이다. 출산율 저하 배경 중 하나는 가사, 육아 부담이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남성의 가사, 육아 참여가 중요하다. 미래에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논의하고 필요한 검토를 해야 한다.”
―이웃 나라 중앙은행 총재 출신으로서 한국 경제에 조언을 한다면….
“한국 경제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라 조언을 하기 조심스럽다. 실제로 일본이 서구로부터 받은 많은 조언은 잘못됐다. 그것을 떠올리면 내가 한국에 같은 일을 할까 봐 걱정된다. 어느 나라든 고유한 사회 관행 등이 존재하는데, 이를 무시한 채 조언하면 안 된다. 다만 다른 나라 경험에서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내는 노력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일본과 한국은 공통점이 많다. 고도 성장에서 안정적 성장으로 전환된 뒤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를 겪고 있다. 유교 문화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회 모습도 비슷하다. 양국이 현재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인 인구 감소에 대해 서로 고민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노력에 대해 전문가들끼리 논의한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1949년 일본 후쿠오카현 출생. 도쿄대 경제학과를 나와 1972년 일본은행에 입행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일본 은행 이사를 거쳐 2008년 부총재에 올랐다. 그해 3월 야당 다수 참의원(상원)에서 일본은행 총재 인사안이 부결돼 총재 직무대행이 됐고, 한 달여 뒤 총재로 공식 취임했다. 돈을 무제한적으로 푸는 ‘아베노믹스’에 이견을 표명하면서 임기 만료 전인 2013년 4월 사임했다. 현재는 아오야마가쿠인대 특별 초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