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거리교화소 위성사진과 위치. 함경북도 청진시와 회령시 중간에 위치한 전거리교화소는 북송된 탈북민이 많이 수용돼 있어 비교적 외부에 많이 알려졌지만, 다른 10여 곳의 교화소 실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구글어스 캡처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그가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가족들의 뇌물이었다. 이를 통해 교화소 내 죄수들 중 넘버2의 위치인 ‘총지령공’ 자리를 따낸 것. 일종의 ‘죄수 간부’로서 “생산 지령과 결과를 관장하고 입소와 퇴소, 병보석, 사망자 등을 종합해 교화국에 보고하는” 업무를 맡는다.
그래서 교화소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고, 그만큼 그의 증언은 특별하다. 전거리교화소에서 죽으면 ‘불망산’에 간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탈북민 가운데 불망산을 실제 가본 사람은 권 씨가 거의 유일하다.
교화소에서는 죽음이 다반사였다. “전거리엔 매일 10여 명이 새로 입소하는데, 사람이 죽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제일 적게 죽는 날이 2명이었고, 평균 5∼7명씩 죽었습니다. 추운 겨울엔 10명 이상씩 죽습니다.”
그의 증언에서도 가장 끔찍한 부분은 시신 처리 과정이다. “죄수가 죽으면 ‘사체보관실’에 쌓아두었다가 저녁에 불망산으로 부르는 외딴 화장터에서 태웁니다. 시체를 처리할 때는 총지령공과 수레꾼 4명 등 모두 8명이 갑니다. 화장터엔 굵은 철근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틀이 있는데, 아래에 나무를 쌓고 시체를 올려놓습니다. 죄수들이 삐쩍 말라 시신은 통나무 두께도 안 됩니다. 한 구는 머리를 오른쪽에, 다음은 머리를 왼쪽에 놓는 식으로 차곡차곡 놓으면 틀에 모두 12구의 시신이 올라갑니다. 저녁에 불을 지피고 내려갔다가 아침에 올라가면 재들이 선반 아래에 수북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걸 삽으로 퍼서 화장터 주변에 막 뿌리고, 빗자루로 씁니다. 무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저녁에 또 반복됩니다. 화장에 쓰는 통나무는 죄수들이 산에서 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총지령공 기간에 전 씨가 처리한 시신만 수천 구였다. 이런 지경이니 교화소에서 3년을 버티면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다.
전거리교화소는 북한에서 규모가 작은 축에 속한다. 그가 있을 당시 북한에는 교화소가 모두 12곳이 있었다. 제1호 교화소인 평양 화천교화소는 신분이 드러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주로 수감돼 있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강동에 2교화소, 사리원에 3교화소, 개천에 4교화소 등 전국 각지에 교화소는 분산돼 있다. 가장 규모가 큰 함흥교화소엔 무려 1만 명이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모든 교화소에서 전거리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끔찍한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다.
북한엔 교화소만 있는 게 아니다. 교화소 수감자들이 안전성에 소속된 노예들이라면, 정치범수용소의 정치범은 보위부의 노예들이다. 그 외에도 군인을 수감하는 군 교도소, 보위원만 따로 수감하는 보위부 대열, 깊은 산골에 격리되는 추방기지 등도 존재한다.
권 씨의 증언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엔 북한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이 담겨 있었다.
체제를 지키는 사냥개인 보위부와 안전성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할 수 없는 독재자들은 대신 노예들을 하사했다. 노예는 죽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노예는 얼마든지 충원된다. 노예들이 생산하는 식량과 땔감 등으로 사냥개들과 이들의 주인인 평양의 지배계층이 먹고산다. 이게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표방하는 노예 국가 북한의 실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