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가까운 회사 동료가 최근 퇴직했다. “다른 건 아쉽지 않은데, 수십 년간 함께했던 동료, 이 좋은 사람들과 아무 관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무척 상실감이 느껴진다….” 역시 몇 달 뒤 퇴직을 앞둔 다른 동료의 얘기도 절절했다. 그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우리끼리라도 퇴직 후 연 1, 2회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다짐이 이어졌다.
올 6월 퇴직한 또 다른 동료의 송별회에선 그의 지인인 타사 사진기자가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어 줬다. 그의 지시에 맞춰 전체 부원이 배경이 돼 박수를 치고 주인공은 꽃다발을 들고 웃음 짓는 ‘행복한 그림’이 나왔다.
본인 역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사진기자는 쓸쓸하게 사라지는 퇴직자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고자 기회가 닿는 대로 사진 촬영 봉사를 다닌다고 했다. 퇴직 전 평소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찍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를 통해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배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그도 사무실을 뒤로하고 낙향했을 것이다.
퇴직을 앞두면 누구나 회한이 적지 않다. 수십 년 한 우물을 파온 ‘운 좋은 직장인’이라면 그 상실감은 더욱 크다. 어쩌면 이런 풍경도 조만간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요즘 청년 세대에게 커리어 관리법은 이직을 거듭하며 몸값을 높이는 게 상식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5060 구세대들은 여전히 회사에 정 떼지 못해 힘들고, 퇴직 이후 삶은 막막하다.
100세 카페를 통해 만나 온 ‘이런 인생 2막’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과거를 말하다 가슴속 꾹꾹 눌러둔 회한에 힘들어하기 일쑤였다. 더러는 한 맺힌 응어리였고, 때로는 가슴 먹먹한 복받침이기도 했다. 커리어에 미련이 남았거나 잘나가다가 푹 꺾어지는 계기가 있었던 사례자들은 특히 그랬다. 소위 말하는 ‘불완전연소감’이다. 일본의 직장소설에는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로부터 버림받은 중장년 이야기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런 혼돈의 시기를 거쳐 결국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냈다. 평생 해온 일의 연장선에서 강연이나 저술 등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분들도 있다. 퇴직한 뒤 아예 새로운 기술을 배워 ‘○○기사’ 자격증을 따낸 뒤 인생 2막을 걷는 분들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었다.
3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그림 서예 사진 등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영균 씨(77)가 대표적이다. 그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후 벌써 3년이 다 됐는데, 매년 전시회 소식을 전해 온다. 올해도 11일부터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60세 넘어 처음으로 해외여행에 도전한 김원희 할머니(74)는 매년 한 달 정도 본인이 모든 계획을 짜서 배낭여행(실제로는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을 다닌다. 최근에는 처음으로 자가 출판 플랫폼을 통해 오롯이 본인 힘으로 책을 냈다고 알려왔다. 제목은 ‘여행은 현재 진행 중: 운 좋으면 120살까지’인데, “자가 출판이다 보니 홍보가 잘되지 않는다”며 하소연했다. 나이 듦을 받아들이지만 ‘그냥 할머니’는 아쉬워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는 쉬지 않고, 하지만 무리하지도 않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벌인다.
이런 분들에게 불완전연소감이란 없다. ‘30년 근속 부장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멋진 할머니’ 등, 각자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한 증거라면 세상이 알아봐 주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트로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성공과 출세도 좋지만 “잘 살아왔어”라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의 인정과 응원, 격려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더 크고 험한 세상으로 출발하는 선후배 동료들에게 따스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