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프로이트 시대의 정신분석은 피분석자가 독주(獨奏)를 하고 분석가는 청중이자 비평가, 반주자(伴奏者) 역할을 했습니다. 분석가를 중립성·익명성을 지키는, ‘마음의 거울’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현대 정신분석은 다릅니다. 분석가는 여전히 자유연상을 듣고 해석을 제공하지만, 피분석자와 분석가가 함께 연주하는 이중주(二重奏)의 과정으로 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음악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긴장과 이완으로 점철(點綴)된 다중성, 희로애락(喜怒哀樂)입니다. 숨어 있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찾아 이해하려면 공부, 수련,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호함은 무의식의 산물입니다. 연주가 되는 음악에는 작곡가와 연주자의 내면세계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청중은 자신들의 내면세계가 그들의 내면세계와 소통해 이어지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각자의 반응은 고유하지만, 무의식의 세계는 오묘해서 어떻게 감동을 받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같은 음악을 듣고도 느낌이 다 다릅니다. 정신분석 역시 그러합니다. 무의식에서 흘러나오는 자유연상을 분석가가 듣고 해석하는 상호작용에서 피분석자의 마음에 파장이 일어납니다. 혼자서 하는 연주가 아니고 두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같이 ‘연주’하는 겁니다. 음악에 음의 높고 낮음, 박자, 리듬, 느림과 빠름, 반복, 쉼, 주제가 있다면 분석에도 상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모호함에서 분명함으로 옮겨가서 활용하려면 그러한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불협화음은 피분석자와 분석가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피분석자가 호소하는 부분을 분석가가 엉뚱한 음 또는 엇박자로 ‘연주’하면 피분석자는 좌절, 분노합니다. 엉뚱한 해석은 두 사람이 연주하면서 같은 구절을 동시에 연주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연주가 중단될 겁니다. 느리게, 신중하게 다룰 상처 덩어리를 분석가가 급하게 탐색하면 피분석자 마음에 상처가 늘어납니다. 협주자는 신중해야 합니다. 신중해야 하지만 원칙에만 매달린 경직된 분석은 피분석자 마음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악보에만 충실한 기계적인 연주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수가 있어도 진심을 담은 연주가 감동을 주듯이, 미숙해도 최선을 다하는 젊은 분석가의 노력은 분석에 힘을 보탭니다.
상상해 봅니다. 마음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없는 피분석자,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분석가. 악보를 읽을 수 없는 연주자들과 같습니다. 분석이 정체, 중단될 겁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재즈에서 배우는 즉흥성과 자발성이 분석 진행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충분한 수련으로 갈고닦은 정교한 기법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음악이 마음을 정화하고 감동을 준다면 분석은 공감, 이해, 자기 성찰로 이어집니다. 분석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화음이 맞으면 무조건 좋은 일일까요? 지나치게 잘 맞는다면? ‘홀로서기’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이중주’의 한쪽으로 남아 분석가에게 계속 의존하려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음악도 분석도, 감수성을 높여서 하는 작업이니 힘이 듭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