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일기장’ 펴낸 정민 교수 “관찰사도 잡지 못한 지도자 검거… 천주교와 사전교감 있었기에 가능 행간 읽어야 진심에 다가갈 수 있어” 30대때 쓴 일기 4종 첫 한글 번역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64·사진)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 같은 모습의 다산과 젊은 시절의 그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그는 2006년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처음 출간한 뒤 20년 가까이 다산 연구에 매달린 한국의 대표적 인문학자 중 한 명. 신간 ‘다산의 일기장’(김영사)을 펴낸 그가 3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나섰다. 이번에는 ‘30대의 다산’을 재조명했다고 한다.
다산이 유배생활했던 전남 강진 고택 조선 후기 문신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천주교를 탄압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유배 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군의 유적.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다산이 유배를 가기 전 천주교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숨겨져 있는 30대 시절 일기 4종을 국내 최초로 번역했다. 오른쪽 사진은 안경을 쓴 다산의 초상화. 국가유산청·강진군 제공
공식적으로는 천주교 ‘배교’를 택했지만 끝까지 종교를 버리지 못한 다산의 이중적인 면모도 잘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 지도자인 이존창 검거 사건이다. 다산은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후 정조의 명령으로 포졸과 장교 한 명을 대동해 충청도 관찰사도 못 잡던 이존창을 잡는 데 성공한다. 당시 다산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정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수년 동안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한 천주교 지도자를 아무 저항 없이 붙잡아 온 것은 이미 다산이 천주교 쪽과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다산은 이후 이존창에게 천주교 활동을 안 하겠다는 ‘다짐장’을 받고 풀어줬다.”
정 교수는 그러면서 “국학계는 다산이 천주교에 미쳤지만 자기 손으로 털고 나왔으니 더 연관시키면 불순하다고 하고, 천주교계에서는 다산이 ‘배교자’이니 관심 없어 한다”고 덧붙였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기 부담스러웠던 다산이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하며 어려운 상황을 넘겼다는 것이다.
책은 정 교수가 다산일기를 번역하면서 든 궁금증 100가지에 대한 자문자답 형식으로 구성됐다. 일기와 기존 다산의 시문집과 다른 역사서들의 기록을 대조해 길지 않은 다산의 일기를 자세히 해설한 점이 눈에 띈다. 정 교수는 “일기 자체는 무미건조한 팩트만 나열했지만, 행간을 면밀히 읽어야 다산의 진심에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정 교수는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연구에 집중해 왔다. 최근에도 다산이 특정 집안에 보낸 편지 24통을 새로 입수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간담회에서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연암 박지원”이란 농담을 던지면서도 “다산과 불교의 관련성 등 앞으로도 다산의 다양한 면모를 다뤄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만일 제가 다산을 만난다면 (그가) 묘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아요. ‘내가 너 때문에 참 성가셨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네가 내 속을 좀 알아주니 고맙다’라는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