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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이상훈]‘아날로그 왕국’ 日서 종이 보험증 사라진다… 전자정부 정책 박차

입력 | 2024-12-03 23:09:00

‘디지털화 추진’ 증명서 일원화 日… 마이넘버 카드에 건강보험증 결합
이달 종이 보험증 신규발급 중단… 편리한 기능 갖췄지만 보급 더뎌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국민 불안… “아날로그 남겨두자” 불만 여전
내년 운전면허도 마이넘버 통합




2일 일본 도쿄 주오구의 한 약국 접수대에 마이넘버 보험증 인식기가 설치돼 있다. 일본 정부는 이날부터 종이 건강보험증 신규 발급을 전면 중단하면서 마이넘버 카드를 보험증으로 이용해 달라고 독려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2일 오후 일본 도쿄 주오구의 한 약국. 병원 처방전을 들고 온 40대 남성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접수대에 설치된 기계에 올려놨다. 카드 인식을 마치고 4자리 비밀번호를 누르자 접수가 완료됐다. 약사가 종이 건강보험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던 종래의 본인 확인 방식이 디지털화된 것이다.》


일본 마이넘버 카드 견본. 앞면에는 얼굴 사진과 이름 주소 등이, 뒷면에는 12자리 일련번호가 기재돼 있다. 사진 출처 일본 총무성 홈페이지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일본에서 ‘디지털 주민등록증’ 격인 마이넘버 카드에 건강보험증을 결합한, 이른바 ‘마이넘버 보험증’이 전격 도입됐다. 이날부터 기존 종이 건강보험증 신규 발급이 전면 중단됐고, 유예기간 1년이 끝나는 내년 12월부터는 종이 건강보험증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아날로그 문화를 고수해 온 일본이 디지털화를 촉진하기 위해 야심 차게 실시하는 국책 사업이다.

일본 정부는 의료 디지털화를 전자 정부 정책의 핵심으로 삼고 마이넘버 보험증 정책 성공에 사활을 걸고 있다. 향후 마이넘버 카드 하나만 있으면 모든 정부 사무를 디지털로 처리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갖고 있다. 하지만 개인정보 노출에 민감하고 디지털화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일본에서는 정부의 마이넘버 카드 정책에 대한 반발이 여전하다.

● “편리하다” “불안하다” 반응 엇갈려

약국에서 마이넘버 카드를 사용한 40대 남성은 “병원, 약국에서 간편하게 접수시킬 수 있고 접수 시간도 짧아졌다. 주민표(한국의 주민등록등본) 발급받을 때도 편리하다”라며 마이넘버 카드의 장점을 꼽았다.

병원이나 약국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지금까지 반드시 기초자치단체에서 발급하는 종이 건강보험증을 보여줘야 했다. 병원 직원은 접수대에서 환자 이름, 생년월일, 유효기간, 발급 일련번호 등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며 기록했다. 하지만 마이넘버 보험증은 마이넘버 카드 인식 기계에 갖다 대기만 하면 환자 정보가 곧바로 의사 컴퓨터에 표시된다. 얼굴 인식 기능도 갖춰 본인 확인을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다. 환자가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하면 다른 의료기관 진료 이력, 약 처방 명세 등도 확인이 가능하다. 응급 상황에 구급대가 곧바로 진료 및 투약 이력을 확인해 신속한 처치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서 마이넘버 카드는 여전히 낯선 존재다. 이날 해당 약국에는 30분간 9명의 환자가 방문했는데, 마이넘버 카드를 사용한 사람은 40대 남성 1명뿐이었다. 약국에서 만난 70대 여성은 “평생 건강보험증을 문제없이 잘 쓰고 있는데 왜 바꾸는지 모르겠다. 기계는 어렵고 복잡하다”고 말했다. 카드를 갖다 댄 뒤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보였다. 실제로 마이넘버 카드가 있으면 아무 병원이나 약국 혹은 온라인에서 간단한 등록 절차를 거쳐 보험증으로 쓸 수 있다.

그래도 주요 구청 마이넘버 상담 창구에는 사람이 몰리는 추세다. 도쿄의 대표적인 주택가 지역인 네리마구의 구민사무소에는 이날 하루에만 주민 50여 명이 몰려 마이넘버 카드 발급을 신청하거나 건강보험증 연동 여부를 문의했다.

사실 일본은 이미 2021년부터 마이넘버 카드에 건강보험증 기능을 넣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존 종이 보험증에 익숙한 국민의 거부감이 컸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6월 현행 종이 보험증을 폐지하고 마이넘버 카드와 보험증의 일원화를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마이넘버 카드를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지자체가 발급하는 ‘자격 확인서’를 발급받아 쓸 수 있다.

● 유력 총리 후보도 못 피해 간 논란

일본은 한국 같은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납세, 연금, 은행 거래, 의료 정보, 보조금 지급 등이 제각기 따로 관리됐다. 무엇보다 전자정부 전환에 걸림돌이 됐다. 일본 정부는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디지털화를 실현하기 위해 2016년부터 일본판 주민등록번호 제도인 마이넘버를 도입했고 IC칩이 내장된 마이넘버 카드 발급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제도와 앞선 전자정부 구현에 관심을 보였다.

모든 일본 국민 및 거주 외국인에게 12자리 마이넘버가 부여됐지만, 마이넘버 카드 보급은 더뎠다. 민감한 개인 행정 정보를 12자리 번호로 통합 관리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겪은 뒤 마이넘버 카드가 있어야만 10만 엔(약 90만 원)의 재난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보급이 본격화됐다.

2022년에는 경제 부양 대책으로 마이넘버 카드 신청자에게 최대 2만 엔(약 18만 원) 상당의 포인트를 지급하며 신청자가 더욱 많아졌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올 10월 기준 일본 전체 인구의 75.7%가 마이넘버 카드를 소지하고 있다.

마이넘버 카드 보급 확산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민의 불안은 여전하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마이넘버 카드로 발급받은 주민표, 호적증명에 타인의 정보가 등록된 사례가 확인됐다.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등록된 은행 계좌가 다른 가족이나 엉뚱한 사람 명의로 등록된 경우는 13만 건 이상 나왔다. 이름이 잘못 표기되거나 한자 이름이 깨진 채 주민표 등에 출력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잇따른 사고에도 디지털 행정 책임자였던 고노 다로(河野太郎) 전 디지털상은 마이넘버 카드에 문제가 없다며 건강보험증 일원화를 밀어붙였다. 결과적으로 일원화는 실현됐지만, 고노 전 디지털상은 지지율이 추락했다. 올 9월 사실상 일본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노 전 디지털상은 후보 9명 중 8위에 그쳐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에게 불과 1표(1차 투표 기준) 뒤진 2위였지만, 마이넘버 카드 논란이 유력 총리 후보자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 마이넘버에 사활 건 일본 정부

일본 정부는 마이넘버 보험증 성공에 사활을 걸고 있다. 마이넘버 카드를 다른 나라에 뒤처진 디지털화를 따라잡기 위한 핵심 정책으로 보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국회에서 “(마이넘버 보험증은) 본인의 보건의료 정보를 활용해 적절한 의료 제공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라며 장점을 알렸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관방장관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국민이 이용하는 게 중요하다”며 “국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알려 이용 활성화를 도모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4%에 불과했던 마이넘버 보험증 이용률은 올해 15%로 높아졌다. 보급 속도가 느리진 않지만, 여전히 국민 다수가 이용하는 서비스라고 말하긴 어렵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의 나가쓰마 아키라(長妻昭) 대표 대행은 “(종이 보험증 발급 중단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아날로그를 남겨 둘 필요가 있지 않나”라며 반발했다.

일본 정부는 내년 봄부터 스마트폰에 마이넘버 보험증 기능을 탑재해, 카드를 갖고 가지 않아도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한다. 내년부터는 난치병 환자들에게 지급한 ‘수급자증’도 마이넘버 보험증으로 통합한다. 또 내년 3월부터는 마이넘버 카드에 운전면허증도 결합해 IC 카드에 면허 정보를 디지털로 심을 예정이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