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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가치 투자다[소소칼럼]

입력 | 2024-12-08 10:00:00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광판. 뉴스1

주식 단타로 번 돈으로 결혼기념일에 비싼 식사를 했다. 주식 창이 빨갛게 물들면 섣불리 축배를 들었다가도, 파랗게 돌변한 코스피에 얼굴까지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나는 영락 없는 K-개미다. 주가 그래프처럼 요동치는 마음,깃털처럼 가벼운 손가락. 이렇게 충동에 약하고 본능에 충실할 수가 없다. 그나마 패가망신을 면한 것은 야수의 심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계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아야만 잠을 이루는 콩알만 한 심장 덕분이다.

돌아보면 위험을 회피하고 성미가 급한 나에게 결혼은 어려운 숙제였다. 애초에 단타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손절도 힘들다. 게다가 주식 투자는 포트폴리오 분산이라도 가능한데, 결혼은 인생을 한 사람에게 ‘몰빵’해야 하는 초고위험 투자가 아니던가. 장기 투자도 이런 장기 투자가 없다.


● 결혼이라는 ‘몰빵’ 장기 투자
결혼에는 적기라는 게 있다는데, 본디 근시안적인 내게 20~30대에 ‘어떤 주식에 평생을 묻을 것인지’ 선택하라는 이 제도는 적지 않은 압박으로 다가왔다. 시계의 초침은 부지런히 가는데,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과의 첫 만남에서도 결혼에 ‘30년 계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폈고, 초면인 그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자녀들의 성장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30년 보호예수 기간을 두고 매도를 제한했다가, 그 기간이 지난 뒤 계속 보유할지 매도할지를 자발적으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초장기 초고위험 투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게 언뜻 비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결혼을 결심했다며 말했다. “꼬박꼬박 배당을 주면서도 고수익을 안겨주는 성장주는 잘 없잖아. 결국 내가 원하는 게 안정적인 현금 흐름인지 높은 수익률인지를 알아야 해.“ 

사업을 하고 야망이 큰 이 친구는 내조를 잘하고 가정에 충실한 아내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배우자가 진취적인 야심가이길 바랐다. 하지만 결혼을 주식에 대입해 보니 자신의 기대가 허황됐음을 깨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덜 도전적이지만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했다.

그의 말에 나도 한 번 결혼을 주식에 빗대어 보기로 했다. 내가 바라본 당시의 남편은 ‘저평가 가치주’였다. 분명 원석처럼 반짝이고 펀더멘털도 튼튼한데, 시장에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창의적이고 엉뚱한 사업가 기질 때문에 변동성도 컸다. 

정말 가치주가 맞다면 언젠가 제값을 찾아갈지도 모르지만, 시장을 둘러보면 ‘만년 저평가’ 주식이 태반 아닌가. 모든 저렴한 주식에는 싼 이유가 있고, 언젠가 오르기만 기다리다 자칫 물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반대로 현시점에 시장 가치가 높은 ‘고평가’ 주식에 투자하는 게 나은가도 생각해 봤다.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단기로 보면 불타기가 나쁘지 않은 전략이겠지만, 영원히 오르기만 하는 주식은 없거니와, 평가에 거품이 꼈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주식이 비싼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꼭짓점에서 상투 잡고 하락장을 정통으로 맞을 확률이 더 높지 않겠나.


● 결혼만큼은 워런 버핏처럼
그래서 결혼만큼은 워런 버핏처럼 하기로 했다. 가치 투자가 답이라는 결론이었다. “10년을 보유할 주식이 아니면 10분도 보유하지 말라”는 버핏의 유명한 격언처럼, 결국 결혼이란 가격의 단기 등락과 관계없이 10년도 아니고, 수십 년 보유할 단 하나의 주식을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 

이는 본질적으로 ‘물려도 괜찮은 반려 주식’을 찾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단지 수익률에 대한 기대로 투자하면 주가가 떨어질 때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주식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기저에 있다면 당장의 파란 창을 바라보는 심정이 조금은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 ‘종목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하지만, 특정 종목밖에 고를 수 없는 결혼은 예외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그 긴 세월 ‘존버’하면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깊고 두려운 침체의 골짜기를 견딜 수 없을 테니.

동시에 위험 헤지(hedge)는 ‘나’로 하기로 했다. 포트폴리오 분산이 안 된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던 내가 놓치고 있던 한 가지가 바로 나라는 존재였다. 가장 확실한 결혼의 헤지는 본인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자라는 주식이 오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그 부침을 떠받쳐줄 수 있는 나의 안정성과 수익성에 베팅하기로 했다. 완벽한 헤지를 위해 내 삶에 더 충실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이 사진은 연출한 장면이며 기사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동아일보DB

물론 살다 보니 내가 더 변동성이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남편에게 말하고 싶다. 인제 와 풋옵션(주식을 팔 수 있는 권리)은 없다고. 투자 결과는 먼 훗날 함께 계좌를 열어봐야 알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순항 중이다. 상대방 입장도 들어봐야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일생일대의 투자인 만큼 주가가 장기 우상향하면 좋겠다. 아니다, 한 번쯤은 ‘떡상’해도 괜찮을 것 같다.  시간은 투자자의 편이고, 우리에겐 아직 남은 시간이 많으니까.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