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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서 의약바이오까지… 100년 이어온 ‘산업보국’ 창업정신

입력 | 2024-12-06 03:00:00

[기업 한류, K-헤리티지로]
〈9〉 식품산업 근대화 삼양그룹
창업주 “기업은 국가 경제 기여해야”… 설탕 국산화 등 ‘기간산업발전’ 강조
4세 경영인 “유전자 치료제 등 도전… 인류의 미래 바꿀것” 새 100년 선포




삼양사 창업주 수당 김연수 선생의 집무실.

10월 초 찾은 삼양사 울산1공장. 울산항 부두에 인접한 이 공장은 1955년 12월 준공했다. 공장에서는 수당 김연수 창업주가 머물던 집무실을 연구소로 바꾸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나무 지붕, 70년 전 김 회장이 쓰던 의자와 책상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직원들은 공장을 오갈 때마다 이 건물을 지나친다.

1956년 공장 가동을 시작할 때 설치했던 원심분리기.

삼양사 1공장은 울산 최초의 근대화 시설이다. 바다를 메워 만든 매립지에 세워졌다. 삼양사는 수입에 의존해왔던 설탕을 이곳에서 생산해 해외로 수출하는 역사를 썼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국내 대표 장수 기업의 자부심은 공장 곳곳에서 느껴졌다. 달큰한 냄새가 진동하는 공장 한편에는 1956년 공장 가동을 시작할 때 설치했던 원심분리기(이물질을 걸러내는 기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종혁 삼양사 울산1공장 공장장은 “원심분리기를 볼 때마다 설탕이 무척 귀하던 시절 삼양사가 한국 식품 산업의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라는 생각이 들어 뭉클하다”며 “창업주의 ‘산업보국’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 ‘귀한 몸’ 설탕, 국내 첫 생산…‘먹거리’ 기간 산업

1924년 김 창업주가 삼수사(三水社)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삼양사는 먹을거리가 궁핍했던 시절 ‘산업보국’(산업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을 기업 경영 목표로 정하고 이를 한 세기 동안 실천했다.

1925년 전북 부안군 줄포면과 보안면, 산내면의 경지를 묶어 줄포농장을 출범했다. 삼수사는 1931년까지 총 7개의 농장을 조성해 한국 영농 근대화에 앞장섰다. 식량이 늘 부족했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기업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농장 사업을 정리한 뒤엔 염전 사업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당시 농지로 조성하지 못한 간척지가 남았던 점, 소금 부족 사태로 국민들이 식량난을 겪고 있던 점 등이 사업 전환의 배경이 됐다.

1950년대 전쟁 직후 시작한 설탕 사업도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들의 식생활 개선을 위한 결정이었다. 삼양사 관계자는 “창업주는 전후 국가 경제에 기간 산업 발전이 필수라고 판단했다”며 “다양한 식품의 원재료로 쓰여 식품 산업의 ‘기간 산업’으로 꼽히는 설탕은 당시엔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다”고 말했다. 1965년 당시 9급 공무원 첫해 월급이 약 3700원이었는데 설탕 가격은 5kg에 500원일 정도로 비쌌다. 설탕은 명절과 성탄절, 결혼 축하 선물 주요 품목 중 하나였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제당공장을 준공한 것도 설탕의 수입 의존도를 낮춰 국가 경제에 기여하겠다는 뜻에서였다. 김 창업주는 평소 “기업이 이익을 위한 집단에 그쳐서는 안 되며, 국가와 사회에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부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경영 철학을 강조했다.

삼양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 확장은 이 산업보국 헤리티지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삼양그룹은 전분당, 밀가루 등 식품 사업의 기초가 되는 소재 사업을 시작한 데 이어 전분, 물엿, 올리고당, 알룰로스 등 생산 품목을 넓혔다. 지금은 식품 외에 신소재 및 석유화학 부문과 의약바이오 사업에도 진출했다.

● “인류의 미래를 바꾼다” 새로운 100년 선포

설탕의 원재료인 원당이 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다. 울산=이민아 기자 omg@donga.com

설탕 생산이 주된 수익원이었던 삼양사에 닥친 위기이자 기회는 설탕을 비만의 원인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2016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국민영양 안전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당 섭취를 줄이도록 하는 ‘제1차 당류저감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대체 감미료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2012년부터 알룰로스 개발을 시작했던 삼양사는 2020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성공해 설탕을 대체할 미래 먹거리를 발굴했다.

삼양사 스페셜티(고기능성) 제품인 알룰로스는 자연계에 있는 희소당으로 설탕 대비 70% 정도의 단맛을 내지만 칼로리는 ‘제로’인 대체 감미료다. 현재 알룰로스는 ‘없어서 못 팔 만큼’ 수요가 전 세계에서 급증하고 있다. 올해 9월 삼양사는 알룰로스 신규 공장을 준공해 연간 생산량은 기존 대비 4배 늘어난 연간 1만3000t이 됐다.

울산 남구 울산2공장. 국내 최대 규모 알룰로스 공장으로 1400억 원을 투입한 신공장이다. 삼양사 제공

10월 1일 100주년 기념식에서 삼양그룹은 ‘생활의 잠재력을 깨웁니다. 인류의 미래를 바꿉니다’를 그룹의 새 소명으로 제시했다. ‘스페셜티 소재와 솔루션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글로벌 파트너’라는 새 비전도 공개했다.

이날 미래 비전 발표는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의 장남인 김건호 전략총괄 사장이 맡았다. 김 사장은 “100년 전 배고픈 국민들을 위해 농장으로 시작한 삼양이 성장과 혁신을 거듭해 오늘날 반도체와 유전자 치료제 같은 글로벌 첨단 산업에 도전하고 있다”며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창업주가 강조했던 산업보국 정신이 4세 경영인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상순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설탕 사업을 시작했던 창업주는 국민들의 식생활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이라며 “시간이 흐르면서 설탕에 대한 인식이 변한 지금은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대 경영인들이 ‘사람이 먹어서 이로운 것’을 찾아나가며 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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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이민아 기자 om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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