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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삶 좀먹는 과거의 영광, 추억은 가끔 퇴행적이다

입력 | 2024-12-07 03:00:00

불가리아 작가 첫 부커상 수상작… 알츠하이머 치료 위한 과거 재현
국가적 이슈로 커지며 사회 혼란
현실 도피적 ‘추억 예찬’ 꼬집어
◇타임 셸터/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민은영 옮김/1만7800원·460쪽·문학동네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과거 요법 클리닉 ‘타임 셸터’. 소설은 과거에 다시 살 수 있다는 발상이 질병 여부와 무관하게 점점 더 많은 이를 사로잡으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유럽 각국이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장면이 대표적. 기억과 정체성, 노스탤지어의 본질에 대한 흥미로운 우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독 그리운 인생의 한 시점이 있는가. 여기, 꿈에서도 그릴 법한 그 시절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방이 있다. 어릴 적 내 방에 붙어 있던 벽지, 북슬북슬한 노란색 이불, 비틀스의 포스터까지. 이곳에선 쉰 살의 몸도 여덟 살의 몸이 돼 긴 털이 간질거리는 이불 위에 누일 수 있다.

노인정신의학과 의사 가우스틴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해 과거를 세밀히 재현한 ‘과거 요법 클리닉’을 고안한다.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살구색 건물에 클리닉을 만들고 층마다 각기 다른 10년을 완벽히 재현한다. 지난해 불가리아 작가 최초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타임 셸터’ 이야기다.

소설은 기억을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그들의 내면 시간과 일치하는 공간을 창조한다. 누군가의 머릿속 시간이 1965년이라면 적어도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만이라도 1965년이 되게 하자는 발상이다. 몇 달 동안 입도 뻥긋하지 않던 환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할 거란 기대에서다.

소설가인 화자는 가우스틴의 조수로서 과거의 물건과 이야기를 모아 클리닉을 꾸민다. 타자기, 초콜릿, 담배, 포스터 같은 소품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과거 이야기, 때로는 향기와 빛까지 수집의 대상이다.

알츠하이머 클리닉으로 시작한 소설은 점차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과거에서 다시 살 수 있다는 개념이 질병과 무관하게 점점 더 많은 이를 사로잡은 것. 현재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과거로 회피하겠다는 욕망은 점차 유럽 전역에 퍼진다. 급기야 국가 전체가 함께 회귀할 과거의 특정한 시대를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된다. 각기 다른 시대를 주장하는 정당이 설립되고 집회가 벌어진다.

고국인 불가리아를 찾은 화자는 나라가 2개의 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60, 70년대 국가사회주의 시기를 주장하는 세력과 오스만제국에 대항했던 19세기 말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국가주의 세력이다. 두 세력은 배우들을 고용해 집회 행사를 연출한다. 1차 세계대전의 발단이 됐던 사라예보 사건을 재연하는 행사 도중 소품 총에서 실탄이 발사돼 페르디난트 대공 역의 배우가 실제로 사망하는 장면에서는 과거가 되풀이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소설은 뚜렷한 줄거리를 속도감 있게 전개하기보다는 환자들의 사례나 인물들의 일화, 서술자의 메모와 단상, 그림 스케치 등을 곳곳에 배치하는 느슨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일화는 독립된 이야기처럼 흥미롭다. 기본적으로는 기억과 정체성, 노스탤지어의 본질에 대한 흥미로운 우화다. 유럽 각국이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장면이 대표적. 과거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 어떤 퇴행을 부르는지 거침없는 전개로 보여준다.

작가는 브렉시트 등 유럽 전역에서 위대한 과거를 들먹이는 보수적 포퓰리즘이 만연한 세태를 보며 세계가 ‘과거’라는 팬데믹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영원한 과거와 노스탤지어를 향한 그릇된 욕망이 불러올 위험에 대한 한 편의 사고실험 같은 소설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