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문화부 차장
1795년 7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금정찰방에 좌천된 다산 정약용이 황급히 충남 보령 땅을 찾았다. 천주교 배교를 증명하려면 천주교 지도자 이존창을 잡아오라는 정조의 명에 따른 것. 성거산에 숨어들어 수년간 충청도 관찰사조차 검거하지 못한 이존창은 달랑 포졸 한 명만 데리고 간 다산에게 손쉽게 붙잡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고전학자인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신간 ‘다산의 일기장’(김영사)에서 이 미스터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천주에 대한 신앙과 왕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평생 번민한 다산이 신앙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 정 교수는 “많은 신도들의 도움을 받은 이존창이 별 저항 없이 붙잡힌 것은 이미 다산과 천주교 측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해당 사건이 다산과 이존창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음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 문헌 자료도 남아 있다. 왕의 언행을 날마다 기술한 일성록(日省錄)의 1797년 2월 23일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이존창은 재작년 금정찰방(다산)의 염찰(廉察·몰래 탐문하는 것)에 걸려 감영 감옥에 갇혔다. 그가 바친 공초(供招·죄인의 범죄사실 진술)를 보니 전날에 뉘우쳐 깨달은 것과 상반된다. 그렇다면 지난날 공초를 바친 것은 속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이존창이 풀려난 뒤에도 옛 습관(천주교 신앙)을 고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신에서 영화 ‘식스센스’급의 반전이 펼쳐진다(스포일러 주의). 막부 감시하에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되는 관 속에 작은 십자가를 쥐고 있는 로드리게스의 손이 클로즈업된 것. 막부의 탄압에 어쩔 수 없이 배교를 했지만, 평생 그의 내면에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어쩌면 다산도 겉으로는 배교를 선언했지만, 로드리게스처럼 남몰래 천주교 신앙을 지킨 게 아닐까.
사실 다산이 정통 주자 성리학의 궤도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실학(實學)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를 비롯해 서양 학문과 과학기술을 통칭한 서학(西學)의 영향이 컸다. 그런데도 다산의 배교 이후 천주교 신앙이 그의 삶 전체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주목한 연구는 드물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국학계는 다산이 천주교에 미쳤지만 자기 손으로 털고 나왔으니 더 연관시키면 불순하다고 하고, 천주교계에서는 다산이 배교자이니 관심 없어 한다”고 설명했다.
훌륭한 예술작품의 캐릭터에는 선과 악의 양면이 공존하듯, 역사적 인물을 영웅 혹은 배신자의 이분법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세상을 일도양단의 흑백 논리로 접근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걸 우린 3일 밤 경험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