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배우 정우성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제45회 청룡영화상에 최다관객상 시상자로 등장해 ‘혼외자 논란’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KBS 캡처) /뉴스1
며칠 뒤 그 배우가 한 영화제 단상에 나서 전 국민에 사과하고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공식 발표하는 모습은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하이라이트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게 국민들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할 일이었을까? 그의 개인사는 이토록 화제를 일으킬 만한 일이었나.
방송인 사유리 씨와 그의 아들. KBS 2TV 캡처
● 사실 새로운 일도 아닌데…
엄밀히 말하면 이 유명 배우의 사례는 흔히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야기할 때 말하는 비혼 출산과는 거리가 있다. 보통 비혼 출산이라 하면 자녀를 갖고 싶지만 결혼을 원치 않거나, 결혼제도 하에서는 도저히 뜻을 이룰 수 없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결혼 외 방법으로 자녀를 갖고 키우는 걸 뜻한다. 해외에서 정자 기증을 받고 혼인 배우자 없이 아이를 낳은 방송인 사유리 씨의 출산이 대표적인 예다. 즉 적극적으로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갖고 싶은 이들이 비혼 출산을 하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룬다.
유럽과 미국 등 많은 선진국에선 이런 식의 가족 구성이 흔하다. 이들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제도가 마련돼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 ‘팍스(PACS)’는 1999년 동성 커플을 법적 동반자로 인정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지금은 이용자의 90% 이상이 이성애자일 정도로 누구 할 것 없이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결합 제도다. 결혼보다는 제한적이지만 팍스 구성원들은 가족으로서 법적 권리를 누린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불편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성애자이고 가족으로 살 거라면 왜 굳이 결혼 대신 연대를 선택할까. 기존에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졌던 법적 의무와 사회문화적인 속박, 억압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구보다 가부장제 부담이 크고 혼외출산은 기대하기 힘든 한국에서 비혼 가족 제도 도입은 초저출산을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의 하나로 꼽혀 왔다.
유혜미 대통령실 저출생대응수석이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이른둥이 맞춤형 지원대책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 한부모 등 법적 인정받은 가족조차 차별적 시선
그렇다면 이 새롭지 않은 가족이 왜 전례 없는 일처럼 화제가 되었을까. 이런 가족조차 낯설 정도로 한국의 가족 문화가 여전히 획일적이고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눈부신 변화와 성장을 이룬 한국이지만 가족 문화만큼은 기존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일명 ‘정상 가족’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가 강한 사회다. 정상 가족이란 보통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아빠와 주부 엄마, 그들의 생물학적 자녀 둘 혹은 하나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고 옳은 형태라 생각하는 가족이다.
외국에선 비혼 상태에서 연애하다 출산하고 아이를 부모 중 한 명이 키우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로 간주돼 온 게 사실이다. 이번 유명 배우 사례도 상대 여성이 당당히 아이를 낳고 키운다고 한 점에서 더 새롭게 인식됐을 것이다.
정의당 당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비혼출산지원법·생활동반자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5.31/뉴스1
● 고령사회, 어르신 비혼 수요도 늘 것
비혼 출산의 비율이 전체 출산의 5%도 안되는 나라는 한국, 일본 등 전 세계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럽 등에선 절반 이상이 비혼 출산으로 태어난다. 결혼을 해야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은 모두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록 새로운 가족 형태는 아니었지만 유명 배우 사례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족에 대해 얼마나 닫혀있고 편협한가 일깨운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배우가 국민 앞에서 사과하는 장면은 외국인들 눈에 매우 희한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상대 여성이나 아이에게 사과할 일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가 그 사과를 받을 일은 없다.
비혼 가족 제도는 흔히 생각하듯 자유분방한 요즘 젊은이들만을 위해 필요한 제도가 아니다. 고령사회로 갈수록 어르신 수요도 늘어날 것이다. 독신인 어르신은 물론 이혼, 사별로 혼자가 되는 어르신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결혼했거나 자녀가 있는 경우 다시 결혼하는 건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비혼 가족 제도가 도입된다면 많은 어르신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여생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노인 빈곤률이 높고 노후에 연금 등 사회보장이 약한 사회에선 황혼 비혼 가족이 새로운 돌봄 대안도 될 수 있다.
정치권에서 오래간만에 생활동반자법이나 비혼 출산, 동거 지원 이야기가 나와 반가웠는데, 정치 이슈 탓에 다시 묻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종북세력 척결이나 계엄 단죄가 아닌 10년, 20년 뒤 미래에 대한 준비다.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로 들어선다. 출산율은 조금 오른대도 0.7명 대에 불과하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 없이 5년, 10년 내 큰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다.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