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지옥의 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권력의 眞空 채우려 다들 혈안 미래 권력이 누구 몫인지도 중요하지만 G10 걸맞은 ‘민주주의 복원력’ 보일 때
정용관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5석 부족한 정족수 미달로 폐기됐다. 한남동 관저의 대통령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을지 모르나 ‘지옥의 문’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다.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궁극의 권한이지만 화석(化石)화된 유물인 줄 알았다. 40여 년 전 봉인된 칼을 꺼낸 대가는 엄청날 것이다. ‘장님 무사’라는 표현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탄핵이 되든 안 되든 이번 사태로 윤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을 잃었다. 권력의 레지티머시(Legitimacy·정당성)가 실질적으로 소멸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제2의 계엄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대통령 의지(意志)의 영역도 아니다. 국방부와 군 수뇌부가 “요구 있어도 절대 수용 안 한다”고 공개 경고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군통수권자의 영(令)은 바닥에 떨어졌다.
윤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깊은 성찰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계엄군을 국회에 투입하고 이동 상황을 직접 체크하고 선관위에 계엄군을 보냈으면서 “야당 경고용”이라고 한다.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지, 향후 내란죄 혐의를 피해 가기 위한 변명은 아닌지 의문이다.
이 대목에서 계엄 국면 초기 잠시 정치적 존재감을 보이는 듯하던 한동훈 대표의 행보가 흥미롭다. “조속한 직무정지”를 주장하더니 “조기 퇴진”으로 슬쩍 말을 바꿨다. 조속한 직무정지의 길은 탄핵밖엔 없는데, 한남동 관저를 다녀온 뒤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으로 전환한 것이다. “당에 일임”이란 대통령 말에 넘어간 건지, 이참에 자신이 정국을 리드할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국정 공동 책임자를 자처하고 나섰는데 어찌 될지 지켜볼 일이다.
탄핵안 1차 표결은 긴 권력 투쟁의 예고편이다. 향후 대권은 시간표와의 싸움이다. 윤 대통령의 처지는 큰 변수가 되진 못할 것이다. 탄핵이든 하야든 물러나되, 언제 어떻게 물러나느냐의 문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즉각 퇴진, 아니면 탄핵” 주장도, 한 대표의 “조기 퇴진” 주장도 결국 언제 대선을 치르는 게 유리한지의 수싸움 성격이 짙다. 국민의힘이 수모를 감수하고 탄핵 보이콧에 나선 것도, 민주당의 이 대표와 친명 지도부가 속전속결로 탄핵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민주당은 매주 탄핵안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젖은 연탄’이었던 탄핵 여론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필 태세다. 국민의힘을 ‘계엄 옹호’ 정당으로 몰아붙일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권 활주로는 안 된다”며 맞선다. 계엄의 불법성과 반민주성은 사라지고 정쟁으로 귀결되려 하고 있다. 우려되는 건 그런 대치가 박근혜 탄핵 때와는 달리 양측을 지지하는 시위대 간 ‘거리의 충돌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계엄 사태를 겪으며 공권력의 통제 기능도 약화됐다.
한국은 어쩌다 이런 나라가 됐나. 난데없이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해 전 세계 언론의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6시간 만에 이를 저지하는 복원력을 보여주는 듯하더니 사후 수습을 놓고 다시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주요 10개국(G10) 국가에 걸맞은 민주공화제 복원은 뒷전이고 차기 권력 향배를 둘러싼 노림수만 번득인다. 외신에 비친 2024년 한국 정치의 현주소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