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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속으로]“환갑 넘어 시작한 공부… 작가로 인생 2막 엽니다”

입력 | 2024-12-10 03:00:00

부산여대 사회복지학부 만학도 13명
동아리 활동서 자전적 수필집 출간
“장애아 양육-다단계 사기-우울증 등
다사다난한 삶, 글로 옮기며 치유”



최근 ‘쉿! 내 안의 숨은 페이지들’이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펴낸 부산여대 사회복지학부 성인학습자 학생 13명이 지난달 27일 부산 부산진구 부산여대 강의실에서 출판기념회를 연 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화영 기자 run@donga.com


“앞으로 경험을 더 열심히 글로 써내겠습니다.”

지난달 27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부산여대 대학본부 5층 강의실. 배미경 씨(58)는 “편견을 갖고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바꿔나가고 싶기 때문”이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배 씨는 “눈물 때문에 글자가 잘 안 보인다”며 소감 발표를 위해 준비해 온 쪽지의 글을 모두 읽지 못하고 마이크를 다른 이에게 넘겼다.

배 씨는 이날 작가가 됐다. 부산여대 사회복지학부에 재학 중인 성인학습자(만학도) 동료 12명과 함께 ‘쉿! 내 안의 숨은 페이지들’이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펴낸 것. 배 씨는 20년 동안 장애 아동을 키워온 경험을 ‘엄마를 빛나게 한 초록 거북이’라는 제목의 16쪽 분량의 글로 담았다. 임신 28주에 800g의 조산아로 세상에 나온 아들은 뇌성마비와 지적장애를 앓았다. 배 씨는 “장애인 엄마 주제에”, “천벌 받았네”라는 모진 말을 주변에서 들으면서도 아들을 e스포츠 대회에 참가하는 활발한 고교생으로 키워냈다.

211쪽 분량의 책에는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웠던 중장년 여성의 삶이 기록됐다. 작가 13명 중 70대가 1명, 50대가 2명이고 나머지는 60대다.

20년 동안 골프장 캐디로 일한 이경희 씨(53)는 동료의 성추행 사건과 이를 문제 삼으려고 하자 발뺌하는 회사의 행태를 지적했다. “남자 친구가 만족하게 해주나”라고 70대 고객이 언어 폭력을 서슴지 않아 사과받길 바랐으나 회사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고 했다. 이 씨는 동생이 숨진 뒤 시작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2년 전 시작한 대학 공부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적었다.

‘꿈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제목의 글을 쓴 손길연 씨(65)도 “대학 진학으로 한층 성숙하고 있다”고 했다. 결혼 후 중국집 등을 운영하며 바삐 산 탓에 그토록 원한 대학 공부를 환갑이 넘어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첫 과제를 받았을 때 ‘11포인트로 작성’이라는 뜻을 몰라 딸에게 물었다. 컴퓨터 글자 크기라고 했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일 때 컴퓨터 수업이 많아 적응하기가 특히 어려웠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 외에 시숙의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 과정에 겪은 고충, 다단계 사기에 빠져 큰돈을 잃었다가 가족의 배려로 극복한 사연 등이 책에 담겼다. 이날 출판기념회 때 돌아가며 연단에 서서 소감을 밝혔는데 상당수가 울음을 터뜨렸다. 박양덕 씨(70)는 “고등학교 졸업 후 50년 만에 대학에 진학한 것만으로 기쁜데 작가라는 호칭까지 받게 돼 영광스럽다”며 “살아있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 수필집은 사회복지학부 동아리 ‘SW(Social Welfare) 유니온’의 7개월 활동 성과다. 동아리는 한승협 사회복지학부장과 이정식 지도교수의 주도로 올 4월 발족했다. 동아리 소속 30여 명의 학생은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모여 글쓰기와 동영상 편집 기술 등을 공부했다. 보고서와 논문 등을 작성해야 하는 대학생은 매끄러운 문장 작성은 필수라며 특히 글쓰기 역량 강화를 위해 힘을 썼다.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학생 가운데 13명은 내친김에 자전적 수필을 써 책으로 엮어 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자신의 글을 수정해달라며 이 교수에게 58차례에 걸쳐 이메일을 보낸 학생도 있었다.

이정식 교수는 “아픈 기억으로 남은 삶을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 많이 울었고, 그 자체만으로 치유가 됐다는 학생들이 많았다”며 “많은 중년이 이 책을 읽고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한승협 학부장은 “대학 생활 중 작가가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며 “내년에도 학생들의 글쓰기 역량 강화를 위해 온 힘을 쏟겠다”고 강조했다.



김화영 기자 r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