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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피하라”[정미경의 이런영어 저런미국]

입력 | 2024-12-11 23:09:00

백악관 시추에이션룸에서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 회의를 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왼쪽)과 각료들. 백악관 홈페이지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I learned about it on television.”(텔레비전 보고 알았다)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세미나에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국의 비상계엄 소식을 어떻게 접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심각했던 행사장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미국의 핵심 안보책임자가 동맹국의 격변 상황을 TV 뉴스를 통해 알게 됐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리번 보좌관은 미국 측과 사전 협의 없는 위헌적 조치에 항의하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습니다. ‘learn’은 단순히 ‘배우다’가 아니라 모르던 사실을 ‘인지하다’라는 의미로 폭넓게 쓰입니다.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은 계엄 선포를 오판(misjudge)이라고 했습니다. 오판만으로 부족했는지 치명적(badly)이라는 단어를 앞에 넣었습니다. 미국 외교 당국자들이 동맹국 정상을 이렇게 강도 높게 비판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The black-and-white questions never made it to me.”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명언입니다. 흑백이 분명한 질문은 대통령 책상 앞에 오지도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쉬운 결정은 밑에서 다 알아서 처리합니다. 대통령은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자리입니다. 이번 계엄 선포 사태처럼 최고 결정권자의 잘못된 판단은 국가를 대혼란에 빠뜨립니다. 미국 대통령의 결정이 남긴 교훈을 알아봤습니다.

△“When you have a tough decision to make, you don’t want people to tell you what you want to hear.”(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은 원치 않는다)

백악관 시추에이션룸에서 오바마 대통령 주재로 오사마 빈 라덴의 파키스탄 은신처를 급습할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위 각료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의견을 밝힐 때 조 바이든 부통령이 강하게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파키스탄과의 외교 마찰, 작전이 실패할 경우 대선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가장 가까운 부통령의 반대에 당황했지만 그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기한 문제점들을 한 가지씩 짚어가며 해결책을 찾아갔습니다. 작전 성공 뒤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고마워한 사람은 바이든 부통령이었습니다. 결정의 순간에 처한 지도자에게 가장 큰 비극은 예스맨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라고 오바마 대통령은 말합니다. 반대로 바이든 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He listened to every voice in the room. That was not an easy task.”(그는 방 안의 모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쉽지 않은 일이다)

△“The final responsibilities of any failure is mine, and mine alone.”(실패의 최종 책임은 나에게, 오직 나에게 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피그만 침공 작전을 승인했습니다. 취임 후 첫 외교 결정이었습니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애송이 대통령” “무모한 작전” 등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실패한 결정 뒤로 숨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We’re not going to have any search for scapegoats.”(희생양을 찾지 않겠다)

후속 성명도 발표했습니다. ‘mine’이라는 단어를 반복해가며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책임 인정에 그치지 않고 실패로부터 배웠습니다. 권력 내부의 집단적 사고가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널리 구했습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고,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실패에서 배우려는 자세 덕분이었습니다.

△“Richard Nixon and the nation have passed a tragic point of no return.”(리처드 닉슨과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지점을 지났다)

미국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사설을 싣지 않는 전통을 가진 시사 주간지 타임이 창간 50년 만에 처음으로 사설을 실었습니다. 타임이 사설을 실었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였습니다. 1만2359자, A4용지 5장 분량이었습니다. 첫 문장은 미국 정치사와 언론사에 남는 명구절입니다.

Point of No Return(PNR)은 항공용어로 회항 불능 지점을 말합니다. 사설은 대통령이 도덕적 권위를 잃은 순간을 PNR로 규정했습니다.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The President Should Resign.’(대통령은 사퇴해야 한다)

사설은 사퇴 논의에 물꼬를 텄습니다. 대통령은 버텼습니다. 8개월 뒤 탄핵 가결이 확실시되자 그제야 부랴부랴 물러났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동정과 지지는 모두 사라진 뒤였습니다. 결단의 시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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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