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편들기 아닌 계엄 규탄 집회 이념 편향 발언하면 “내려가라”… 정당-노조 “외면받을라” 말 조심 아이돌-야구팀 응원 도구 활용… 전문가 “시위 문화도 세대교체”
“시위 힘드시죠, 핫팩-담요 챙겨가세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청 인근의 한 카페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준비된 핫팩이 놓여 있다.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참가자들을 위해 커피나 국밥을 선결제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우리는 대통령의 불법 계엄을 규탄하러 나온 것이지 좌우 어느 진영을 편들려고 나온 게 아니잖아요.”
최근 국회 앞에서 열린 12·3 불법 비상계엄 규탄 집회에 참석한 한 시민은 “좌우 특정 진영의 정치적 발언이 나오면 눈살이 찌푸려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집회 현장에서는 단상 위에 올라간 발언자가 계엄이나 탄핵과는 무관한 특정 이념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시민들이 “내려와라! 내려와라!”고 소리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 이념 색깔 옅어진 탄핵 집회
계엄 사건이 벌어진 후 첫 주말 국회 앞 집회에 참석했던 직장인 김모 씨(25)는 “특정 이념이나 정치 단체들이 집회 분위기를 주도할까 우려했는데 그런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특정 정당이나 노동단체 깃발보다 시민들이 가져온 해학적인 깃발이 더 눈에 띄었다”고 덧붙였다.
취재팀이 취재한 주말 국회 집회 현장에서는 한 여성단체 인사가 단상 위에 올라가 자유 발언을 시작하자 곳곳에서 시민들이 “내려가라!”라고 외쳤다. 발언자가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동안 여성과 성소수자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가자 일부에서는 “계엄과 무관한 일 아니냐”는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 대학생 신모 씨(26)는 “불법 계엄에 분노해 이 자리에 나왔는데 해당 사태와 관련 없는 발언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모 씨(24)는 “안 그래도 탄핵 정국으로 사회가 분열됐는데, 특정 성향 인사들이 나서서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6년 확산했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참여도 많았지만, 집회 현장에서 특정 정당이나 단체, 노조 등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당시 집회에 참여했던 한 40대 직장인은 “대통령에게 분노해서 집회에 나갔는데 마치 나를 노조원이나 당원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최모 씨(29)는 “8년 전에는 민중가요가 울려퍼지는 소위 ‘운동권식 집회’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시민을 위한 ‘축제의 장’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번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한 대학생 유채원 씨(25)는 “현 정권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고 했다.
● 노조 깃발 대신 KBO 야구배트
직접 만든 조명이나 KBO 야구팀 응원 배트를 들고 나온 시민들도 있었다. 10일 국회 앞에서 만난 대학생 최민경 씨(23)는 직접 만든 횃불 모양 조명을 들고 “8년 전 촛불로 통일했다면 지금은 개성 있게 각자 들고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온 친구 임모 씨(22)는 게임 ‘마인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촛불을 직접 만들어 가져왔다. 집회에서 만난 장모 씨(26)는 “야구팬이라 ‘삼성 라이온즈’ 응원 배트를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김은경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집회 시위 문화에도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라며 “지금의 젊은이들은 특정 정치적 이념에 좌우되기보다는 불법 계엄령 자체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