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사 선정∼준공까지 최소 5년 물가-부동산 경기 변동 위험 커 물가인상 배제 특약 무효 판결 있지만 시행사 귀책 사유라 일반화엔 한계
박일규 법무법인 조운 대표변호사
올해 정비업계를 얼어붙게 만든 공사비 이슈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부동산원 공사비 검증 건수는 2019년 2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2년부터 30건 이상으로 급증한 이후 올해는 9월 말 기준 24건에 이른다.
정비사업은 다수 소유자가 시행에 참여해 호흡이 길 수밖에 없다. 통상적으로 시공자 선정 이후 완공까지 최소 5년 이상 장기간이 소요된다. 그동안 물가가 치솟거나 부동산 경기가 출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조합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사 도급 계약에 물가 인상으로 인한 공사비 증액을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건설사 입장에서 보면 이 특약으로 착공 후 물가가 비약적으로 상승해도 공사비를 현실화할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이 가운데 최근 물가 인상 배제 특약 효력을 부인하는 부산고등법원 판결이 나오며 화제가 됐다. 사업시행자인 교회가 착공을 늦춰 달라 요청했던 몇 달 동안 철근 가격이 급상승했다. 이후 시공자는 공사비 증액을 요청했지만 시행자는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을 이유로 거절해 소송까지 이어졌다. 재판부는 시공자 손을 들어줬다. 시공자의 귀책 사유 없이 시행자 측 사정으로 착공이 연기된 경우까지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의 효력을 주장하는 것은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라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최근 판례는 오히려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추세다. 서울고등법원은 사적 자치와 계약 자유의 원칙을 들어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인정한 바 있다. 대구고등법원 역시 △사업시행자가 시공자 선정을 위한 입찰 과정에서 물가 인상 배제 의사를 밝혔다는 점 △시공자 역시 물가 인상 배제까지 고려해 전체 공사비를 산정했을 것이라는 점 △정비사업 시행자가 대형 건설사인 시공자에게 불공정한 특약을 강요할 수 있을 만큼 우월적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을 이유로 특약 무효를 주장한 건설사의 청구를 배척했다.
일부 건설사들은 부산고법 판례를 근거로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이 공사비 현실화를 가로막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특약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의 적용 범위나 한계를 명확히 하는 등 합리적 계약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근본적 처방이라고 볼 수 있다.
사업시행자도 합리적 선에서 특약의 내용을 수정하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 기존 특약만 고집하면 공사 중단이나 시공자 교체 이슈를 맞닥뜨리기 일쑤기 때문이다. 또 장기적으로 건설사가 총공사비 자체를 높여 물가 인상 배제 특약이 가져오는 불리함을 상쇄하려 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