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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종의 낭만, 눈 결정에 반했던 과학자들[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24-12-12 22:57:00

이기진 교수 그림


첫눈이 내렸다. 폭설이었다. 1907년 근대적 기상 관측이 이루어진 이래, 117년 만의 11월 적설량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내가 사는 인왕산 자락에도 눈이 높게 쌓였다. 아침 첫 일반물리학 수업을 하기 위해 새벽에 내린 눈을 헤치고 걸어 내려가는데, 불편함보다는 겨울이 선사한 낭만에 그리운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지구상 모든 곳에 눈이 내리는 것은 아니다. 눈이 오는 곳은 남북 양반구 위도 35도 위다. 예외적으로 열대 지방이라도 고산지대에는 눈이 내린다. 습한 공기가 산을 타고 넘어가면 고도가 100m 높아질수록 평균 0.5도가 낮아져서 대량의 눈과 비를 만든다. 영동 지방의 대설이나 히말라야산맥의 눈이 이 원리로 만들어진다. 이 현상을 푄 현상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눈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름은 수직으로 발달한 적란운이다. 지상 약 1.5km 높이에 영하 10도 이하에서 만들어지는 눈이 함박눈이다. 여러 개의 눈 결정이 달라붙어 눈송이를 만들다가 무거워지면 중력에 의해 지상으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속도는 시속 20∼30km다. 영하 20도 이하에서 만들어지는 눈은 싸락눈이다. 백색의 투명한 얼음 알갱이 같은 눈이다. 습도와 기온이 낮고 바람이 강할 때 만들어진다. 이 눈은 뭉쳐지지 않는 가루눈 형태다. 내리는 눈이 녹아서 비와 함께 섞여 내리는 눈이 진눈깨비다. 지상의 기온이 2도 이하일 때에는 눈이 쌓이게 된다.

눈을 과학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은 과학자는 저 유명한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다. 1611년 ‘육각형 눈송이에 대해’라는 책을 통해 그는 눈의 결정이 육각형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눈 결정의 형태를 최초로 눈으로 본 과학자는 현미경을 통해 세포를 발견한 영국의 로버트 훅이다. 그는 1665년 현미경으로 눈을 보고 눈의 모습을 정확히 밝혀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모양은 얼마나 다양할까? 눈 결정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사람은 미국의 기상학자이자 사진가인 윌슨 벤틀리다. 그는 눈의 종류가 6000종이 넘는다는 것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그렇게 그는 얼음을 포함해 구름이나 빗방울, 안개의 모습을 처음으로 밝혀낸 최초의 구름 물리학자(cloud physicist)가 되었다.

한때 아르메니아 코카서스산맥에 있는 뷰라칸 천문대에서 연구원 자격으로 겨울에 머문 적이 있다. 해발 1500m 산 정상에 자리한 천문대 주변에 천체물리학자들이 모여 살았다. 그중 많은 과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별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별이 하늘에 떠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부러운 일이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천문대에 눈이 오기 시작해 늦은 봄까지 쌓여갔다. 일주일 연속 눈이 내리는 날도 많았다. 이럴 땐 산 정상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지만, 자신의 별을 가진 과학자들과 함께 음식도 해 먹고 보드카도 마시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정지된 시간이 만들어준 시간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줬다. 지금 생각해도 그립고 멋진 시간이었다. 눈이 올 때면 코카서스 산자락의 마을이 더 그리워진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