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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전투식량 들고 다니는 ‘종말론자’ 진짜 속내

입력 | 2024-12-14 03:00:00

최고급 벙커 지어 올린 사업가 등
유행처럼 퍼진 종말론 전모 분석
“남성성 중심 시대로 가려는 환상”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마크 오코널 지음·이한음 옮김/336쪽·2만2000원·열린책들




‘프레핑(prepping).’ 종말 직전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사냥칼, 전투식량, 요새 등 준비물을 갖추는 일에 강박적으로 투자하는 하위문화다. 그런데 과연 기후 위기, 핵무기, 민주주의의 붕괴로 위협받는 지금, 이런 행위가 목숨을 지켜줄지 의문이다. 저자는 “프레퍼는 두려움이 아닌 환상에 대비하고 있다. 더는 유용하지 않은 남성성 중심의 생활 양식으로 회귀하려는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프레핑은 주로 미국 백인 남성 위주로 행해진다.

책은 종말론적 사고의 전모를 파헤친다. 종말을 맹신하는 이들이 준비해둔 안전시설 등을 직접 탐방하며 그 과정을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온갖 음모론을 신봉하는 미국 부동산업자가 세워 올린 ‘최고급 벙커’에는 DNA 보관소와 승마장 등이 들어서고, 뉴질랜드의 땅은 기후 위기와 정치적 소요에서 비교적 안전한 ‘억만장자들의 피신처’로 판매된다. 저자는 “이러한 업체를 수용할 수 있는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붕괴한 문명”이라고 지적한다.

종말론을 마주할 때면 두려움뿐 아니라 지겨움, 부당함 등 여러 감정이 동시에 두루뭉술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따져본다. 저자는 “오늘날 종말론의 문제는 지겹다는 것”이라며 종말이 어떤 한 원인으로 청천벽력처럼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전조들을 보이며 느리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미국 일론 머스크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화성 식민지 계획처럼 종말에 대비해 우주를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은 석연찮은 느낌이 든다고 저자는 밝힌다. 이런 계획은 “과학기술에 대한 20세기 낙관론과 흥분을 회복하려는 연습”이라며 동시에 식민지 팽창 시대를 연상케 한다고 꼬집는다.

종말론적 불안의 다양한 근원을 밝혀냄으로써 몰락의 시대에 알맞은 마음가짐을 제시하는 책. 즉, 캄캄한 미래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와 ‘희망’에 다시 눈길을 돌리자는 것이다. ‘도피라는 죽음’과 허무주의 대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직시하고 나아갈 것도 권한다. “모든 것은 무(無)로 변한다. 그러나 그전까지 모든 것은 무가 아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라.”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