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 찾아온 브루크너(오른쪽)와 그를 맞이하는 바그너를 그린 오토 뵐러의 실루엣화.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경모했지만 음악극에 매진한 바그너와 달리 교향곡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열흘 동안의 초겨울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네 공연장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 두 곡,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듣는 여정이었다.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안톤 브루크너(1824∼1896)는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바그너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3번 등 여러 작품에서 바그너의 음악적 특징들을 오마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더 이상 다를 수 없었다. 브루크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1848년 유럽 시민혁명 당시 체제를 지키는 국민경비대에 입대했다. 바그너에게 종교는 영웅주의의 표현이었다. 1848년 혁명 당시 그는 극장의 지붕에 올라 혁명기를 흔들었고 현상금이 붙은 채 망명 생활을 했다.
4일,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허바우에서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지휘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은 브루크너 교향곡 1번은 현악과 금관 파트들의 밀도 높은 합주력이 돋보였다. 강박적인 이른바 ‘브루크너 반복’, 전체 합주가 갑자기 쉬는 ‘브루크너 휴지(休止)’ 등 브루크너의 개성들은 초기 교향곡부터 발견된다. 6일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에서 앨런 길버트 지휘 북독일방송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은 교향곡 8번은 브루크너 특유의 양감을 빌드업하는 지휘자의 뚝심이 인상적이었다.
두 작곡가의 성향은 음악적인 면에서도 그들이 선택한 장르에 따라 뚜렷이 갈린다. 바그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이 형식의 종말을 알리는 기념물로 간주했고, 음악과 문학, 미술 등 여러 예술 장르를 아우르는 ‘종합예술’로서의 음악극을 꿈꾸었다. 브루크너는 교향곡에서 신이 부여한 과제를 찾아냈다.
바그너는 자신이 지은 실제 소리의 건축물들 못지않게 자신이 개혁한 음의 재료와 설계 방법으로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화성과 관현악법의 혁신을 이뤘으며 그의 후예인 말러, R 슈트라우스, 푸치니, 시벨리우스 등이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영역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브루크너는 그 첫 영향권에 든 작곡가였다.
브루크너는 바그너 음악극의 장엄함과 숭고, 서사적 성격을 교향곡에 끌어오려 했다. 바그너의 혁신적인 화성을 도입했고 바그너가 강화한 금관악기의 두터운 질감을 자신의 버전으로 소화했다. 교향곡 6번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지막 교향곡인 9번에는 ‘파르지팔’의 동기들이 엿보인다. 특히 두 사람을 묶는 큰 지향점으로 ‘거대한 정신적 고양’을 꼽는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법열(法悅)에 가까운 웅대한 클라이맥스는 두 사람의 음악을 지배했다.
여행의 마지막 공연은 바그너가 감독으로 재직했던 드레스덴의 오페라극장 ‘젬퍼오퍼’에서 9일 감상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인터메초’였다. 부부간의 다툼을 그린 가벼운 내용이지만 바그너의 예술적 유전자를 떠올리게 하는 휘황한 관현악의 질감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여러 면에서 기억에 남을 겨울 여행은 그렇게 여운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