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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칼럼]‘개혁 주체’에서 ‘개혁의 적’으로 바뀐 尹의 운명

입력 | 2024-12-17 23:21:00

트럼프 리스크 앞두고 한국만 ‘수취인 불명’
장기간 금기 용어 될 ‘윤 브랜드’ 4대 개혁
합리적 보수의 기대 오독해 제멋대로 계엄
개혁의 중대 기회 걷어찬 리더로 기록될 것



박중현 논설위원


“요즘 트럼프가 한국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불쑥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니 탄핵 절차에 들어가 ‘청구서’ 보낼 상대가 없어져서….”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초현실적인 일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촉발하는 희극적 측면을 찾아내 스트레스 압력을 낮추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농담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 대통령의 내년 1월 20일 취임을 앞두고 그의 입에 오르내린 나라의 정상들은 좌불안석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관세 부과, 방위비 분담 등 요구안을 꺼내들기 전에 이번 사태가 터져 한국은 차기 정부가 들어설 4∼6개월 뒤까지 ‘수취인 불명’ 상태가 됐다. 7일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미치광이 전략의 달인’ 트럼프가 “지금 세상이 미쳐 가는 것 같다”고 했는데, 시리아 정부 전복, 프랑스 정국 불안과 함께 한국도 이유 중 하나일 거다.

물론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은 농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트럼프 재집권 충격에 대비해 일본은 고 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을 급파하고,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은 143조 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프랑스는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에 트럼프를 초대했고, 캐나다 총리는 그를 만나러 플로리다까지 날아갔다. “트럼프 취임 첫 100시간 안에 한국에 영향 미칠 일이 많이 생길 텐데, 한국엔 대처할 사람이 없다”는 경고가 현실이다.

트럼프 리스크가 아니더라도 한국은 심각한 대내외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중 갈등으로 인해 반도체·자동차 수출 전망엔 먹구름이 끼었다.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소비 위축은 만성화 조짐이 뚜렷하다. 재도약할 방법은 구조개혁뿐이다. 그런데 연금·노동·의료·교육 등 이른바 ‘4대 개혁’을 추진하던 윤 정부가 자폭하면서 개혁 엔진이 멈췄다.

더 큰 문제는 개혁의 주역이어야 할 대통령이 개혁의 안티테제(antithese·반대), 개혁 이름을 걸고 딴생각을 한 ‘빌런’으로 각인됐다는 점이다. 향후 좌건 우건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윤석열 브랜드’ 정책들은 ‘개혁을 개혁이라 부를 수 없는’ 금기어가 될 공산이 크다. 정권 재창출로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관료들조차 전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녹색성장을 입에 올리지 못했으니, 이번엔 그때보다 강도가 심하고 훨씬 오래갈 것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시작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반동의 신호는 뚜렷해지고 있다. 반도체 연구개발(R&D) 직종 주 52시간제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던 경제계의 목소리에선 힘이 빠지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보다 의료 개혁에 더 중요한 실손보험 개편 작업은 중단 위기다. 노동계에선 윤 정부의 건설현장 노조 폭력 근절 조치를 되돌려 놓으란 요구가 나온다. 올해 5월 여야가 타협할 뻔했다가 윤 정부가 걷어찬 ‘보험료율 13%, 소득 대체율 44%’의 국민연금 개혁안조차 향후 미래 세대에 부담이 커지는 쪽으로 개악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년 반 전 여소야대 속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당선된 정치 초보 대통령으로선 주요 개혁 한두 개만 성공해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실행할 두뇌도, 정치력도 없으면서 과욕을 부려 경제·사회 전 분야로 개혁 범위를 키웠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참패, 합리적 근거를 못 대는 의사 정원 2000명 증원 등 수많은 ‘딜러 미스’를 지켜보며 합리적 보수층은 기대를 접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바란 게 있었다.

상법, 양곡관리법 개정 등 시장경제 원칙과 개혁을 거스르는 입법을 차단하고, 이전 정부의 비현실적 탈원전 정책 등을 원상 복구하는 골키퍼 역할이라도 정상 임기 종료 때까지 다해 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제 혼자 힘으로 판을 뒤집겠다며 공을 몰고 나가더니 계엄을 선포해 게임 자체를 중단시켜 버렸다. 윤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미션을 철저히 오독했다. 젊은 날 그가 사법시험에 8번 낙방한 것도 이렇게 출제자 의도를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오답을 무모하게 써냈기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까지 든다.

이제 시대착오적 ‘반(反)영웅’이 돼버린 그는 포기해서도, 실패했어도 안 되는 중차대한 국가 개혁의 기회를 걷어찬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후퇴시킨 일, 그것이 윤 대통령이 저지른 최대 죄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