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스크 앞두고 한국만 ‘수취인 불명’ 장기간 금기 용어 될 ‘윤 브랜드’ 4대 개혁 합리적 보수의 기대 오독해 제멋대로 계엄 개혁의 중대 기회 걷어찬 리더로 기록될 것
박중현 논설위원
“요즘 트럼프가 한국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불쑥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니 탄핵 절차에 들어가 ‘청구서’ 보낼 상대가 없어져서….”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초현실적인 일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촉발하는 희극적 측면을 찾아내 스트레스 압력을 낮추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농담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 대통령의 내년 1월 20일 취임을 앞두고 그의 입에 오르내린 나라의 정상들은 좌불안석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관세 부과, 방위비 분담 등 요구안을 꺼내들기 전에 이번 사태가 터져 한국은 차기 정부가 들어설 4∼6개월 뒤까지 ‘수취인 불명’ 상태가 됐다. 7일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미치광이 전략의 달인’ 트럼프가 “지금 세상이 미쳐 가는 것 같다”고 했는데, 시리아 정부 전복, 프랑스 정국 불안과 함께 한국도 이유 중 하나일 거다.
물론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은 농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트럼프 재집권 충격에 대비해 일본은 고 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을 급파하고,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은 143조 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프랑스는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에 트럼프를 초대했고, 캐나다 총리는 그를 만나러 플로리다까지 날아갔다. “트럼프 취임 첫 100시간 안에 한국에 영향 미칠 일이 많이 생길 텐데, 한국엔 대처할 사람이 없다”는 경고가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개혁의 주역이어야 할 대통령이 개혁의 안티테제(antithese·반대), 개혁 이름을 걸고 딴생각을 한 ‘빌런’으로 각인됐다는 점이다. 향후 좌건 우건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윤석열 브랜드’ 정책들은 ‘개혁을 개혁이라 부를 수 없는’ 금기어가 될 공산이 크다. 정권 재창출로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관료들조차 전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녹색성장을 입에 올리지 못했으니, 이번엔 그때보다 강도가 심하고 훨씬 오래갈 것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시작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반동의 신호는 뚜렷해지고 있다. 반도체 연구개발(R&D) 직종 주 52시간제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던 경제계의 목소리에선 힘이 빠지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보다 의료 개혁에 더 중요한 실손보험 개편 작업은 중단 위기다. 노동계에선 윤 정부의 건설현장 노조 폭력 근절 조치를 되돌려 놓으란 요구가 나온다. 올해 5월 여야가 타협할 뻔했다가 윤 정부가 걷어찬 ‘보험료율 13%, 소득 대체율 44%’의 국민연금 개혁안조차 향후 미래 세대에 부담이 커지는 쪽으로 개악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년 반 전 여소야대 속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당선된 정치 초보 대통령으로선 주요 개혁 한두 개만 성공해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실행할 두뇌도, 정치력도 없으면서 과욕을 부려 경제·사회 전 분야로 개혁 범위를 키웠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참패, 합리적 근거를 못 대는 의사 정원 2000명 증원 등 수많은 ‘딜러 미스’를 지켜보며 합리적 보수층은 기대를 접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바란 게 있었다.
상법, 양곡관리법 개정 등 시장경제 원칙과 개혁을 거스르는 입법을 차단하고, 이전 정부의 비현실적 탈원전 정책 등을 원상 복구하는 골키퍼 역할이라도 정상 임기 종료 때까지 다해 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제 혼자 힘으로 판을 뒤집겠다며 공을 몰고 나가더니 계엄을 선포해 게임 자체를 중단시켜 버렸다. 윤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미션을 철저히 오독했다. 젊은 날 그가 사법시험에 8번 낙방한 것도 이렇게 출제자 의도를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오답을 무모하게 써냈기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까지 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