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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기둥은 경회루처럼, 유럽식 돔 얹어, 총독부보다 높게”[김대균의 건축의 미래]

입력 | 2024-12-18 23:00:00

첫 설계안은 돔 없는 평지붕… 국회의원들 요구로 돔 추가
6층으로 한 층 더 높이면서 면적 줄어 건물 비해 돔 커져






《당대 여러 요구 반영해 지은 국회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보면 건물에 비해 돔의 크기가 커서 비례에 맞지 않다. 왜일까. 전 세계 의회제도의 초석이 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은 11세기 궁전으로 만들어졌고, 16세기부터 의회로 이용되었다.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은 수백 년간 부분적 붕괴와 증축으로 영국의 전통 양식이었던 고딕양식과 신고전주의 등이 혼재되었다. 그런데 1834년 대화재로 웨스트민스터 홀을 제외하고 전소되면서 공모전을 통해 찰스 배리가 설계한 영국의 전통 양식 네오고딕 설계안으로 지어져 현재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다른 유럽의 상징적 건물들이 돔을 올리는 것과 다르게 수직적 장식과 빅벤과 같은 높고 뾰족한 첨탑을 둔 것은 영국의 전통을 상징하기 위해서다.》



미국 국회의사당은 설계 공모로 윌리엄 손턴이 당선돼 1793년 착공, 1800년 완공됐다. 중앙의 로툰다홀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건축 양식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건물의 남쪽으로 상원 의사당과 문서 보관을 위한 빅토리아타워가 있고, 북쪽으로 하원 의사당과 빅벤 첨탑이 있다.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원으로 배치된 우리나라 국회와는 다르게 영국 의회는 의장을 사이에 두고 여당과 야당이 서로 마주 보도록 긴 벤치형 의자가 좌우로 배치된다. 양쪽 벤치 사이 간격은 과거 쓰이던 검 2개의 길이다. 역사적으로 치열했던 양측 관계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바탕이 된 프랑스 국회의사당은 18세기 지어진 부르봉 궁전을 사용한다. 프랑스 공주 부르봉 공작부인의 대저택이었던 이 건물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의회로 쓰이게 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 1세가 즉위 후 부르봉 궁전의 부분 재건축을 지시해서 건축가 베르나르 포예는 그리스 아테네 신전과 유사하게 계단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운 후 삼각 지붕 모양 페디먼트를 세웠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물이 프랑스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 건물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화려한 바로크양식의 정점에 선 프랑스였지만 귀족을 대표하는 바로크양식을 국회의사당에 쓸 수는 없었고, 19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합리성과 비례를 강조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축을 모방하는 앙피르 양식이 유행했기에 부르봉 궁전은 현재 모습을 하게 되었다.

미국 국회의사당은 워싱턴 중앙 동쪽 캐피톨 언덕에 자리 잡아 ‘캐피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1972년 설계 공모로 윌리엄 손턴이 당선되어 1793년 착공돼 1800년에 완공되었다. 1850년 국회의 규모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건축가 토머스 월터의 설계안을 받아들여 국회의사당의 꽃인 중앙의 로툰다홀을 중심으로 남쪽 하원 건물과 북쪽 상원 건물을 배치하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실 국회의사당을 포함해 미국 전역의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은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다. 그는 고대 로마 시대 공화제를 미국 정치의 모범으로 삼고, 그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르네상스 이탈리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건축양식을 미국에 옮겨 왔다. 팔라디오는 건축의 비례와 대칭, 조화를 중시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축을 통해 르네상스 건축의 정점을 만든 건축가다. 제퍼슨은 정치가이면서 건축가이기도 해서 팔라디오 건축을 바이블로 여겼다. 제퍼슨은 신고전주의 건축을 미국의 전통 건축으로 삼아 미국 건축의 기틀을 마련했다. 국회의사당 로툰다홀 역시 팔라디오의 대표작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이다.

한국 국회의사당(위 사진)은 안영배, 김정수, 이광노, 김중업의 공동 설계로 1975년 완공됐다. 첫 설계안(아래 사진)은 돔이 없는 평지붕 구조였지만 미국의 국회의사당이나 유럽의 돔 건물에 익숙했던 국회의원들의 요구로 돔을 얹었다. 사진 출처 국회 홈페이지·나무위키

한국 국회의사당은 1948년 옛 일본 총독부 청사를 사용하다가 현재 서울시의회로 사용되는 건물인 일제강점기 공연장 ‘부민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사용했고, 1975년 현재 여의도에 자리 잡았다. 1959년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기 위해 건축가 김수근의 안이 당선되었으나 1960년 일어난 4·19혁명으로 남산 국회의사당 건축은 무산됐다. 현 국회의사당은 1967년 ‘한강종합개발계획’에 따른 여의도 개발과 관계가 있다. 이 역시 1969년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국회의사당과 시청, 대법원을 포함하는 여의도 마스터플랜이 추진됐으나 원안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국회의사당만 따로 해서 건축설계 공모가 실시되었으나 역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중복된 공모전을 시행하면서 안영배, 김정수, 이광노, 김중업의 공동안이 만들어졌다.

국회 홀의 바닥을 석굴암 천장 주변의 무늬를 본떠서 만들거나 건물 외부에 24개 기둥을 경복궁 경회루를 본떠 만드는 등 한국적 미를 담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첫 안은 돔이 없는 평지붕 구조였던 데 반해 미국의 국회의사당이나 유럽의 돔 건물에 익숙했던 국회의원들은 돔이 없는 국회 건물을 문제로 지적했다. 건축가들은 국가를 상징하는 국회를 수백 년 전 서양 건축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지을 수 없다고 했지만, 결국 큰 돔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총독부 건물보다 높게 지어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요구로 면적을 줄여 한 층을 높여 지어서 돔이 건물에 비해 비대한 건물로 지어지게 되었다.

건축은 시대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더욱이 국회는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건물로 당대 역사와 전통을 함께 담아 후세에 전하게 된다. 우리 국회 역시 당대 시대상과 인식을 담아서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이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