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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장택동]계엄을 주저앉힌 헌법의 무게

입력 | 2024-12-18 23:15:00

장택동 논설위원


4일 새벽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의원들이 모인 국회 본회의장 화면을 지켜보면서 ‘곧 계엄군이 들이닥쳐 난장판이 되리라’고 걱정한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표결은 순탄하게 진행됐고 계엄은 실패로 끝났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의아했다.

이번 계엄 실행을 위해 최소 1500명의 장병이 동원됐다는 점이 밝혀졌다. 게다가 특수전사령부 산하 707특수임무단과 제1공수특전여단,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특임대 등 내로라하는 최정예 부대가 투입됐다. 방첩사령부, 정보사령부 요원들과 경찰도 가세했다. 국회의 표결을 막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수사와 증언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특전사, 수방사, 경찰에 수차례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독촉했다.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항명죄로 다스린다’며 엄포를 놨다고 한다. 대통령과 장관의 성화에도 장병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 계엄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항명죄’ 엄포에도 움직이지 않은 장병들


1980년 광주의 계엄군 중 상당수는 한강 작가가 적었듯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런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군인들은 강압, 인식론적 한계, 축소된 책임 등 세 가지 범주에서 변명을 내놓는다고 제프 맥머핸 옥스퍼드대 교수는 분석한다. 군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 잘못된 행동인 줄 몰랐다, 또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과거 계엄군들의 생각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라면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2024년 서울의 계엄군은 아무리 명령이라도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했고 실천했다.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헌법의 힘이 작용했다고 본다.

윤 대통령 스스로 “예산 폭거” “입법 독재” 등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처럼 이번 계엄이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다는 점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헌법상 계엄 선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계엄 선포권의 근간이 되는 국군 통수권은 헌법이 정한 대통령의 핵심 권한이지만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행사돼야 한다고 헌법에 적혀 있다.


헌법상 군 통수권의 한계와 군의 중립성


더욱이 헌법에는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명시돼 있다. 종합하면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움직여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은 헌법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은 ‘군의 정치적 중립’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론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개정된 현행 헌법에 새로 들어간 조항이다. 그전까지 11차례 계엄이 선포되고 3차례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국군이 국민을 해치는 비극이 벌어졌다. 군부독재하에서 고통받은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들의 피와 눈물이 쌓여 헌법에 반영됐다.

계엄령에 따라 긴급 출동한 장병들이 헌법을 떠올릴 겨를이 있었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헌법 조항을 세세하게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장의 군인들은 헌법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고, 그 덕분에 헌법 규정에 따른 계엄 해제가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헌법이 작동한 결과가 됐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긴 세월에 걸쳐 헌법의 가치가 개개인의 의식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게는 대통령이 앞장선 계엄을 주저앉힐 만큼 무겁다. 이제 군을 동원해서 권력을 쥐어보겠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세상이 됐다. 혼란과 충격의 와중에 건진 희망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