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은 승민을 설레게 했던 첫사랑이다. 이들은 90년대 추억을 돌이키며 제때 맞추지 못한 감정의 퍼즐을 완성해나간다. 영화 스틸컷.
“씨○, 다 X같아.” - 서연(한가인 역), 영화 ‘건축학개론’(2012)에서
10여 년 전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났다. 한밤중 찻길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는 대학생 승민(이제훈 역)이 그를 피하는 택시들을 잡으려 외칠 때였다. “아저씨, 정릉 가요, 정릉.” 내 첫사랑도 거기 살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따로 있다. 이혼녀 서연(한가인 역)이 제주도 부둣가에서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역)과 술을 마신다. 만취한 서연이 땅에 주저앉으며 울부짖는다. “씨○, 다 X같아.”그때까지 한국 영화에서 작부(酌婦), 몸 파는 여인, 억척스러운 시장 아줌마 말고 쌍욕을 하는 여성 캐릭터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뺨에 번진 붉은 입술연지 자국을 닦아내며 자신에게 손찌검한 남성에게 내뱉거나, 허리춤에 전대(纏帶)를 찬 채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서로 부여잡고 드잡이를 하거나, 소주병 서너 개 쓰러진 대폿집 드럼통에 널브러져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지 않는 상황에서 쌍욕을 하는 여성 캐릭터는 없었다. 더욱이 한가인 같은 아름다운 캐릭터가 쌍욕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도 ‘씨○, 다 X같아’라니.
영화 스틸컷
그나마, 아니 그래도 개인이 꽃을 피운 분야는 대중가요였다. 현재 케이팝(K-Pop)의 자양분은 이때 배양됐다. SM YG JYP는 박진영을 비롯해 사실상 1990년대 20대를 맞은 사람들이 이끌어 갔다. 유희열 방시혁 테디 민희진도 마찬가지다. 당시 기성세대가 ‘도대체 너희 누구야?’라며 붙인 ‘X세대’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사람들이었다. 불운하다면 그게 다였다는 것이다.
‘90년생이 온다’는 이야기도 한물간 것 같은 마당에 1990년대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다만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정치 파르스(farce·소극·笑劇)와 뒤따르는 헛소동을 보고 있자니 정치판에 ‘X세대 정치’가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회한이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책은 최순실에게 놀아난 것이 아니다. 구(舊)시대 정치의 ‘막내’에게 정권을 내줬다는 것이다. 이 비루한 정치는 막내로 끝날 것만 같더니 아예 더 뒷걸음질했다. 불행히도 이 뒷걸음질은 사람이 바뀌어도 멈추질 않을 것 같다. “씨○, 다 X같아.”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