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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문희’ ‘엠호텔’ 등으로 상업화 첫 걸음 뗀 AI 영화계

입력 | 2024-12-20 15:46:00


산타 나문희

배우 나문희(83)가 ‘천의 얼굴’을 지닌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산타복을 입고 설산을 누비며 선물을 뿌리고, 세일러문 의상을 차려입은 채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소리친다. 마피아 두목으로 잔인한 고문을 자행하다가 문어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거대해진 뒤 거리의 빌딩을 모조리 파괴한다. 영화 ‘탑건’의 한 장면처럼 최신형 전투기를 몰고 미사일을 쏘던 인공지능(AI) 나문희는 마침내 관객을 향해 일갈한다.

“미국에 톰 크루즈가 있다면 한국엔 나문희가 있지!”

24일 AI 영화 ‘나야, 문희’ 개봉을 앞두고 영화계가 들썩이고 있다. 그동안 실험 단계에 머물던 AI 영화의 상업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AI 영화가 충분히 발전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일각에서는 어색한 영상 등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반박도 나온다. 과연 현재 AI 영화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왔고 어떻게 영화 생태계를 뒤바꾸게 될까.

● 팔순 넘은 주인공, 우주를 누비다

올 9월 온라인엔 ‘나문희 주연 생성형 AI 단편 영화 공모전’이란 공고가 올라왔다. AI 나문희를 활용해 영화를 만들어보라는 것. 주제는 간단했다. ‘나문희 배우 주연의 영화’. 장르는 판타지, 사극, 액션, 공포 등 자유였다. 나문희를 캐릭터화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거나 젋은 모습으로 구현하는 것도 물론 가능했다.

이 신선한 과제는 신인 창작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상금은 1000만 원에 불과했지만, 약 한 달 동안 총 47편의 작품이 출품됐다. 촬영과 녹음 없이 모든 영상, 대사, 음악을 AI로 제작한 수상작 총 5편이 뽑혔다. 이 수상작 5편을 모아 17분 28초짜리 영화 ‘나야, 문희’가 만들어졌다.

젊은 나문희

영화에서 AI 나문희는 산타, 모나리자, 우주인 등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팔순을 넘긴 진짜 배우와 달리 과격한 액션 장면을 훌륭히 소화한다. 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하늘, 우주를 오간다. 주름 한 점 없는 젊은 시절 모습 등 배우의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재현한다. 나문희가 과거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유행어 ‘호박고구마’를 활용한 대사 등 AI가 만든 각본은 유머까지 갖췄다.

‘진짜’ 나문희도 영화가 마음에 쏙 든다고 고백했다. 나문희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몸이 자유롭지 않은데 영화에선 날개를 달고 날아 다니니까 너무 좋았다. 실제로 가보지 않은 곳에 가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하다”며 “가만히 있어서 뭐 하겠냐.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보다 사는 날까지 활동하고 움직이는 게 좋다”고 했다.

배우 나문희가 11일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단편 AI 영화 ‘나야, 문희’ 시상식에 참석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2024.12.11/뉴스1

다만 실제와 비교하면 어색한 부분도 있다. 특히 목과 얼굴을 잇는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특유의 ‘으흥흥’ 콧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한계다. 나문희는 “영화를 보면서 ‘(나만 낼 수 있는) 소리가 아직 있구나’를 느꼈다”고 했다.

MCA 박재수 대표가 11일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단편 AI 영화 ‘나야, 문희’ 시상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12.11/뉴스1

● 1000원짜리 ‘쇼트폼’ 콘텐츠

사실 이미 AI 영화는 다양한 형태로 상영 중이다. 11일 국내 최초로 AI 영화 ‘엠호텔’이 극장에서 개봉했다. 화려한 도심 뒷골목, 잠잘 곳을 걱정하며 쓰레기통을 뒤지던 노숙인이 우연히 열쇠를 주워 호텔로 들어간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즐기던 노숙인은 호텔에서 뜻밖의 일에 얽히게 된다.

CJ ENM에서 만든 이 영화의 영상 수준은 꽤 높은 편이다. 화려한 도심이나 호텔처럼 흔한 배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 덕에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제 AI 영화제 최종 상영작에 선정되는 등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CGV 관객의 평가를 담은 ‘골든에그 지수’도 81%로 나쁘지 않다. 관객들 사이에선 “AI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용기 있는 한 걸음”, “앞으로 색다른 시도를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눈빛이 어색하다”, “목소리엔 한계가 있다”는 반응처럼 세세한 재현에 한계가 보였다.

상영 시간이 짧은 것은 AI 영화에 있어선 양날의 칼이다. ‘엠호텔’의 경우 상영시간이 6분 31초에 불과해 영화관을 찾아온 관객에겐 지나치게 짧았다. 이 때문에 19일 기준 누적 관객은 약 4000명에 그쳤다.

하지만 길이가 짧은 만큼 관람료도 저렴하다. ‘엠호텔’은 1000원, ‘나야, 문희’는 3000원에 그쳤다. 오히려 ‘쇼트폼 콘텐츠’로 일종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른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이 AI 영화를 보거나, 신기함에 AI 영화를 보러 왔다가 다른 영화까지 볼 수 있는 셈이다. AI 영화가 이런 역할을 할 경우 한파가 몰아치는 최근 극장계에 활력이 될 수도 있다. 서지명 CGV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최근 1000원짜리 쇼트폼 영화 ‘밤낚시’를 보러 방문한 관객의 5명 중 1명이 다른 영화를 관람했다는 통계에 비춰 보면 AI 단편영화의 상업적 가치가 있는 셈”이라며 “쇼트폼 콘텐츠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으는 효과가 있다. 극장이 할 수 있는 여러 시도 중 하나가 AI 영화”라고 했다.

● 논란 속 성큼 다가온 AI 영화 시대

제작자 관점에서도 AI는 상업적으로 괜찮은 선택이다. 배우 출연료, 스턴트 인건비뿐 아니라 각종 촬영 비용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오픈AI의 동영상 생성 AI ‘소라’ 등 다양한 제작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높은 기술력이 없더라도 AI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최근 넷플릭스 등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시작된 배우 몸값, 제작진 인건비 상승이 맞물리면서 AI 영화의 상업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며 “전체 장면을 AI로 구성하지 않더라도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는 컴퓨터그래픽(CG), 위험이 따르는 스턴트맨 촬영 장면을 AI로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영화제에선 AI 영화가 잇달아 출품되고 있다. 올 7월 부천판타스틱영화제(BIFF)는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 최초로 ‘인공지능(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을 만들었다. 올 6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트라이베카 영화제에는 AI 작품 6편이 출품됐다. 동영상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런웨이’도 5월 AI 영화 페스티벌을 열었다.

일각에선 생성형 AI를 학습할 때 사용하는 데이터의 저작권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예로 ‘소라’는 구글 유튜브나 메타의 인스타그램 등에 사용자들이 올린 영상들을 무단으로 학습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지난해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은 AI가 실제 배우의 일자리를 뺏고 배우의 외모와 목소리를 무단으로 도용한다며 대규모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올 8월 개봉한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선 4년 전 사망한 배우 이언 홈이 AI로 등장해 논란이 될 정도로 AI를 어디까지 영화에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만큼 AI 사용과 기존 영화계가 충돌하면 빚어지는 지각변동은 커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깊이가 깊고 서사가 긴 장편영화까진 아니더라도 재치 있는 단편 영화 부문에선 AI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며 “제작비가 부족하고 아이디어는 넘치는 신인 창작자를 중심으로 AI 활용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이지혜 영화평론가는 “AI가 배우의 겉모습을 잘 재현한다고 해도 배우가 배역이나 세계관을 해석하는 역할을 대체한 ‘수작’은 현재 만들기 쉽진 않다”면서도 “AI를 활용한 ‘스낵 컬처’(짧은 콘텐츠)가 영화계에 대규모로 공급되면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