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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만평, 사진으로는 담지 못한 진주 시위대의 목소리[청계천 옆 사진관]

입력 | 2024-12-21 13:00:00

■ 백년사진 no. 92




1924년 12월 9일자 동아만평에 “이야 어쨌든지”라는 만평이 실렸습니다. ‘도청’이라는 글자가 써진 집 왼쪽에 진주라는 한자와 사람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부산이라는 글자 위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림만 보아서는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그 시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1924년 12월 9일자 동아만평


그러다 12월 16일자에 실린 기사와 사진을 보고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진주에서 특파원 김동진이 보낸 기사를 보니 비로소 만평의 의미가 이해됩니다. 진주시에 있던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려고 하자 진주시에서 큰 시위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924년 12월 16일자 기사입니다.

◇ 도청 정문에 쇄도하여 진주 만세를 부르는 광경/ 만평이 실린 일주일 후 신문(1924년 12월 16일자)에 실린 사진.





和田知事急遽上京
漸次擴大되는慶南道廳移轉反對

날로 격렬해지는 도청 이전 반대 운동
총독 초전에 의해 화전 지사 급히 상경

◇晋州에서 特派員 金東進 發電
13일

오후, 시위운동대는 부산 방면과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남선교(南船橋)를 파괴하려는 계획으로 행렬을 지어 이동했다. 그러나 이를

경비하던 경찰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방향을 돌려 면(面) 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소원(小員)들이 모두

사직서를 제출하여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위대는 이에 환호성을 지르며 군청으로 이동하여, 직원들에게 사직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관리 신분상 사직은 어렵고, 휴직은 고려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이후,

시위대는 다시 도청으로 몰려들었으나, 경찰들이 문을 굳게 닫고 응대하지 않아 일시적인 혼란이 발생했다. 더는 돌파구를 찾지 못한

시위대는 화전 지사 관저로 몰려가 오후 4시까지 지사와의 교섭 결과를 기다렸다. 마침내 지사는 “즉시 상경하여 가능한 한 시민의

충의를 전달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지사의 답변이 미흡하다며 함성을 질렀으나, 위원들의 중재로 진정되었다.


후 시위대는 비상종(非常鐘)을 울리며 공원으로 이동해 위원장의 보고를 들었다. 이들은 도청 이전이 예정된 내년 4월까지 반대

운동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진주좌(晋州座)로 향해 연설회를 개최하며 부산일보,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의 신문을 보지 않기로

결의한 후, 밤 8시부터는 달빛을 등지고 시위 행렬을 이어갔다. 화전 도지사는 형세가 점점 험악해짐에 따라 총독의 초전에 의해

14일 오전 1시 급히 상경하게 되었다.

◇食糧供給을拒絶
부산으로 가는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
진주시민회는

매일 평균 550석가량의 백미를 부산 시민에게 공급해왔으나, 13일부터 이를 중단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운수조합과 노동공제회

역시 부산으로 가는 화물의 운송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상인단도 부산과의 거래를 전면 중단하기로 하였다.
평소 진주 장날의 거래액은 평균 17만 원이었고, 연말에는 20만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3일 장날에는 모든 거래가 중단되고 시민들은 도청 이전 반대 운동에만 열중하였다.

◇差別이 可痛
부산이 조선인의 도시라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위원장 김갑순(金甲淳)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운동은 단지 생계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조선인을 차별하는 데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부산이 조선인이 주도하는

곳이라면 이렇게까지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상황이 나빠지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이곳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도청 이전이 현실화된다면 진주에 300가구를 수용할 시설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日本人團을 勸誘
조선인이 주도하는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진주 경찰 당국은 일본인 간부들에게 조선인이 주도하는 이번 운동에 공조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그들은 이를 무시했다는 소문이 있다.

◇繼續되는 赤旗 示威
붉은 깃발을 들고 계속되는 시위
14일

오후에도 시위대는 붉은 깃발을 들고 시위를 이어갔다. 깃발에는 “혈성대(血誠隊)”, “세금불납동맹(稅金不納同盟)” 등 여러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시위대는 남강 다리로 몰려나갔으나, 화물 운송은 전면 중단되어 시가는 죽은 듯한 정적 속에서 시위 행렬만

이어졌다.

◇無可奈何
내무부장의 말
시도 내무부장은 “시민들에게 동정은 하나, 이미 결정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다른 대책을 고려 중”이라며 시민을 위로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

◇馬山도 決死的 反對
시민대회를 열고 반대 결의
마산(馬山)에서도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이 진행되었다. 13일 시민대회에서 “도민 다수의 복리를 무시한 도청 이전은 결사적으로 반대해야 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고, 이후 마산 시내 곳곳에 전단이 배포되었다.
13일 오후 2시, 신마산소학교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수백 명이 결사 반대를 외치며 열띤 연설을 이어갔다. 이어 오후 4시에 열린 제2차 대회에서는 실행위원을 선출하고 결의문을 채택한 후 폐회하였다.



● 사진의 한계, 만평의 역할

신문의 만평은 단순히 웃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의 도구였으며, 대중에게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매개체였습니다. 이번 ‘백년사진’에서 소개한 1924년 진주 도청 이전 반대 운동과 관련된 만평도 그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진주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운동을 담은 기사와 사진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생생한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지만, 만평은 그것과는 또 다른 층위에서 의미를 전달합니다. 사진은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지만, 만평은 그 안에 해학과 풍자를 담아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사진이 때로는 사실을 과감히 드러내기보다는 관조적으로 전달할 여지를 남겨둔다면, 만평은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존재 의의를 잃게 됩니다. 그 선명함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충돌을 불러일으켰고, 만평이 가진 ‘매운 맛’은 그래서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5년 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국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총을 들고 난입해 4명의 만화가를 포함해 12명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소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많이 실은 것에 대한 보복 테러라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동아일보의 경우, 창간호부터 만화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창간호에서는 ‘동아일보’란 글자가 박힌 수건을 허리에 두른 어린이가 까치발로 곧추 서서 손을 위로 뻗어 ‘단군유지(檀君遺趾)’라는 휘호가 쓰인 액자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외세에 지배당한 시대지만, 단군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 독립을 이루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어린이 모습을 통해 표현했다는 평가입니다. 이후에도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이슈를 풍자하며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만평은 일제 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해방 이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도 대중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달하고, 때로는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단순히 언론의 부속물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을 포착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었습니다.

오늘날 만평은 과거처럼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사회에서 만평의 선명한 메시지는 자칫 특정 진영의 공격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며, 작가와 편집자가 스스로 검열하게 되는 환경을 만들기도 합니다.

2009년 동아일보 창간 85주년 특집 기사에서 만화평론가 손상익 박사가 “신문이 열 냥이면 만평은 아홉 냥”이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억압적이고 암울했던 시대, 언론이 수행했던 역할과 그 안에서 만평이 가졌던 비중을 잘 드러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1924년 진주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을 다룬 만평을 통해 우리는 백 년 전의 사회적 갈등과 대중의 목소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과 만평, 각각이 가진 기록의 방식과 특성은 다르지만, 모두가 시대를 반영하고 후대에 역사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오늘은 백년 전 사회적 이슈를 다룬 만평을 보면서, 사진과는 다른 기록으로서 만평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생각해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진과 만평 중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시대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