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불의 새란다.”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중
나는 때때로 몽상에 빠진다. 일에 쫓겨 걸음을 서두르다가도 문득 멈춘다. 그러곤 실속 없는 몽상에 빠져 잠시간 거기 없다. 정확하게는, 몽상에 빠진다기보다는 몽상에 들린다. 지표면과 맞닿은 발바닥이 위로 떠오른다. 눈동자의 방향이 나의 내부를 향하여 열리면 눈앞의 장면들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 시간은 아마도 시가 되는 시간. 현실을 밀고 들어오는 몽상의 이미지에 내맡겨지는 것으로, 우리는 깨어 있을 때도 꿈꿀 수 있다. 시에서 꿈을 빼앗는 일은 시인에게서 심장을 빼앗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12월 3일 기습적인 불법 계엄 선포로 ‘상상은 자유’라는 상투어가 틀렸음을 몸소 알게 되었다. 계엄 포고령은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내용과 위반자 “처단”을 예고하고 있었다. 언어를 통제한다는 의미다. “선량한 일반 국민들”이라는 말의 이면에 ‘선량함’과 ‘일반’에 대한 주도적인 판별 의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상상은 자유가 아니다. 상상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유조차 언어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계엄 해제안으로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순순히 현실에 발목을 내어준다면 몽상의 몸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상상의 자유는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불꽃에 깃든 생명성을 통찰한다. 심지를 태우며 곧게 선 촛불의 이미지로부터 삶에 발붙이고 선 존재가 자신을 태우며 비상의 꿈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한다. 계속 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초(超)불꽃. 불꽃을 뛰어넘어 날아오르는 불의 새. “바람이 불면 금방 꺼진다”는 말에 응수하기 위해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불의 새를 본다. 불이 빛이 되는 것을 본다.
유계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