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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리에 꽁꽁 언 투자… 초중기 스타트업, ‘죽음의 계곡’서 허덕

입력 | 2024-12-24 03:00:00

투자자들 안정적인 후기 벤처 선호
제품 고도화 등 투자 요건도 강화… 3년 이하 초기기업 지원 24% 감소
“美, 창업부터 IPO까지 전과정 지원”… 올 국내 신생 유니콘 2개, 美 56개




“정말 망하는 줄 알았어요. 초기 멤버였던 개발자들까지 전부 떠나보내고 4개월을 무급으로 일했죠.”

김규리 제로원리퍼블릭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올 초 아찔했던 상황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제로원리퍼블릭은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솔루션 ‘스코디’를 운영하는 3년 차 스타트업이다. 성장세를 보이던 기업은 고금리 속 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며 도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3월 매쉬업벤처스로부터 초기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살아남았다.

2022년부터 이어진 고금리 여파로 올 한 해 스타트업들은 ‘투자 혹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 자체가 얼어붙은 데다 투자자들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후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려는 분위기다.

● 2024 신생 ‘유니콘’ 달랑 두 곳

얼어붙은 투자 시장은 수치로도 나타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달 13일 발표한 ‘국내 벤처투자 및 펀드 결성 동향’에 따르면 3년 이하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액은 지난해보다 24.8% 감소했다.

기업들은 투자받기 위한 조건도 까다로워졌다고 체감하고 있었다. 김 COO는 “과거에는 벤처캐피털(VC)들이 창업자의 열정도 중요하게 평가했다면 지금은 초기 제품 고도화 여부와 매출 지표를 보다 세밀하게 따지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러나 제품 양산 체계조차 갖추지 못한 초기 기업은 당장의 실적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투자 시장이 쪼그라들자 후속 투자 유치도 버거워졌다. 창업 3∼7년의 중기 스타트업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정책 지원은 대개 초기 스타트업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라 불리는 이 구간에서 투자금 조달 실패는 기업의 존폐 위기로 이어진다.

한 생성형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경우 창업부터 기업공개(IPO)까지 기업의 라이프사이클에 따른 투자가 이어지지만 한국은 사업 물꼬를 터주는 정책적 초기 지원에는 강하지만 후속 투자는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올해 국내 스타트업 중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 기업)’ 반열에 오른 기업은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과 온라인 상거래 서비스 에이블리를 운영하는 ‘에이블리코퍼레이션’ 두 곳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리벨리온은 SK텔레콤의 AI 반도체 계열사 사피온코리아와 합병해 유니콘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반면 미 정보기술(IT) 전문지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미국은 올해 1∼11월 56개가 유니콘 기업에 등극했다.

한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는 “옥석 가리기도 필요하지만 유니콘 기업이 미래 성장동력과 직결돼 있음을 감안하면 현 기근은 향후 한국의 미래 성장률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 사후 관리 체제-투자 활성화 대책 필요

국내 스타트업 업계는 회생 신청 등 출구전략을 찾기조차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끝내 자금 조달에 실패하면 회생 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투자자 반대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투자사 입장에선 투자 실패를 출자자들에게 소명하기 어렵고 향후 펀딩 모집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하다 보니 기업의 회생 신청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에너지 분야 사업을 하는 A회사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 대표는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직원들이 월급도 포기하면서까지 회생 신청을 준비했는데 투자자 절반이 반대했다”고 토로했다. 한동안 평행선을 달리던 대립 구도는 수개월 만에 투자자들이 자기 지분을 넘기는 매수 청구를 하며 일단락됐다.

지난해 회생 절차를 밟게 된 교육 분야 스타트업 B사는 투자회사가 창업자 개인에게 연복리 15%의 이자를 붙여 투자금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며 가족이 거주하는 주택이 가압류 대상이 돼 업계에 화제가 됐다.

이는 국내 투자 관행으로 꼽히는 ‘이해 관계인 연대책임’ 조항이다. ‘회사가 정상적인 사업 추진이 불가능할 때’ 창업자 개인에게 투자 원금과 이자를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는 투자를 대출로 변질시켜 창업자의 재기 가능성까지 차단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구태언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부의장은 “중소기업진흥공단,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이 연대보증 요구를 중단하기로 합의하는 등 창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여러 기관이 동참하고 있지만 여전히 창업자에게 연대책임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장기적으로는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조그마한 스타트업이라도 대기업 투자를 받으면 상호출자제한 제도에 따라 계열사로 분류돼 중소기업 대상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며 “대기업이나 민간 금융기관이 투자 시장에 더 활발하게 유입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쳐가야 한다”고 했다.



한종호 기자 hj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