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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군이 떼죽음으로 남긴 교훈

입력 | 2024-12-23 23:09:00

북한군 특수작전무력 훈련기지에서 군인들이 9월 11일 김정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와와 벽돌을 주먹으로 격파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러시아로 파병돼 전투에 투입된 부대원들로 추정된다. 노동신문 뉴스1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북한군 최정예 ‘폭풍군단’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속절없이 죽고 있다.

12월 치러진 전투에서 북한군 사상자는 1100여 명이라고 국가정보원이 19일 밝혔다. ‘고기 분쇄기’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최전선에서 열흘 남짓 기간에 1만1000명으로 추산되는 파병 병력의 10분의 1이 갈려 나간 것이다.

실전 속 북한군은 전혀 최정예가 아닌, 가장 한심한 전투원들이었다. 북한군과 교전했던 우크라이나 드론 부대 지휘관은 워싱턴포스트(WP)에 “놀라운 일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40∼50명이 한꺼번에 들판을 달린다. 포격과 드론의 최상의 표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은 드론을 피해 도망칠 줄 알며 숨어서 드론에 총을 쏘지만 북한군은 선 채로 마구잡이로 쏴댔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낮은 레벨의 컴퓨터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증언했다.

북한군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드론과 평야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일부만 맞다.

진짜 이유는 이들이 현대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려 무사’로 키워졌기 때문이다. 특수부대에 입대해 10년 동안 가장 많이 하는 훈련은 맨손으로 벽돌을 격파하거나 뒷발차기로 기와를 박살 내는 따위들이다. 열병식에 나가 발을 배꼽까지 올리며 씩씩하게 행진하는 것도 중요하다.

김정은이 특수부대를 현지 시찰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격술이다. 군인들은 배에 화강석을 올려놓고 망치로 부수고 깨진 유리 위를 맨발로 걸어간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김정은은 활짝 웃으며 너무 좋아한다. 그의 머릿속 특수부대는 우수한 격술가나 차력쇼 전문가들인 것 같다.

특수부대원들이 정작 공격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우크라이나에서처럼 무리를 지어 돌격하거나 갖은 현란한 몸짓으로 이리저리 땅에 뒹굴며 총을 쏜다. 총알을 피한다는 몸짓인 것 같은데, 정작 방탄복을 입고 군장을 착용하면 그걸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지금까지 북한 매체를 통해 본 특수부대 훈련 사진이나 영상에서 현대전의 전투 대형을 본 적이 없다.

한때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폭풍군단의 실체가 우크라이나전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다행이라는 반응도 있다. 북한군 최정예 병력의 실전 능력이 그 정도면 늘 농사와 건설에 끌려다니는 일반 병사들의 수준은 안 봐도 뻔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한국도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 달리기 등의 높은 체력 기준을 통과하고, 사격을 잘해야만 특급전사로 인정해 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지는 전쟁을 통해 뛰기도 힘들어하는 병사도 1인칭 시점(FPV) 드론만 잘 조종하면 특급전사 10명 정도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소개된 29세 우크라이나 드론 조종사 올렉산드로 다흐노도 학창 시절 공부는 하지 않고 비디오 게임만 했지만 참전 후 1년 반 동안 300여 명의 러시아군을 죽였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인 네이비실 소속 크리스 카일이 이라크전에서 사살한 적(공식 160명, 비공식 225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WSJ는 “영화에서 엘리트 군인을 묘사할 땐 강인해 보이는 마초적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오늘날 실제로 전장에서 성과를 내는 건 전투에서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스크린 중독’의 연약한 젊은이들”이라며 “드론 조종에 필요한 것은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닌 빠른 사고력과 예리한 눈, 민첩한 엄지손가락”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병사의 능력뿐만 아니라 육해공 장비의 보유 효율이나 운용 전략에 대해 반드시 통렬한 재점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물론 우리 군이 이미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총 한번 쏘지 못하고 죽는 북한 군인들을 보며 군 개혁만 떠올리면 일부만 보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으로 세상에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변화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전히 반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엘리트 충원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20대 전후 찍기를 잘하는 능력만 갖췄던 사람들에게 수십 년 뒤 국가 운영까지 맡기고 있다. 하지만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고, 살기 위해 바닥을 기어본 사람들이 국민에겐 더 나은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파괴적인 전쟁을 보며 우리의 고정관념도 파괴할 필요가 있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