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했다고 1년이 벌써 끝났지”라는 생각을 올해는 안 하려고 했는데, 기어코 하고 말았다.
심리학적으로 사람들은 무엇이든 중간은 대개 잊고 처음과 끝만 선명하게 기억한다고들 한다. 경험상 나는 처음조차 잊고 끝만 기억하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올해처럼 끝이 충격적인 해에는 그 강렬한 인상이 한 해의 기억을 전부 덮어버리고 만다.
집단적 충격의 경험을 공유하고 힘을 합쳐 헤쳐나가는 일이 물론 중요하지만, 당신의 한 해에는 분명 이밖에도 의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업무용 다이어리를 펼치고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올해의 시간들을 한겹씩 꺼냈다. 무심코 지워져갈 뻔한 시간들에 숨을 불어넣는 12월 말의 의식 ‘1년 연말정산’을 돕는 질문들은 예컨대 이렇다.
올해 가장 잘 한 일
여름 즈음, 인스타그램 어플 타이머를 설정했다. 하루에 20분. 숏폼 영상의 알고리즘에서 허우적대다가 서너시간만에 정신차리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트렌디한 대중문화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비합리적인 합리화도 많이 해봤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열심일 필요가 물론 없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양치를 하다가, 여전히 30초라도 시간이 남으면 여전히 습관적으로 엄지가 인스타그램 어플을 향한다. ‘오늘 설정한 시간이 끝났습니다’라는 검은 화면 앞에 허망하게 방황하는 손가락을 위해 최근에는 다른 어플을 설치했다. ‘서울도서관 통합전자책’. 덕분에 근 한 달간 소설을 네 권은 더 읽을 수 있었다.
올해 가장 도전적이었던 일
계획적인 사람보다 충동적인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이룬다고 나는 믿고 싶다. 평소 안 하던 도전은 애당초에 계획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다 달리기에 조금씩 맛을 들여가던 9월의 일이다. 내년엔 대회에 나가볼까, 하면서 ‘마라톤 접수’를 검색했다. 하루 뒤 정신차려보니 11월 말에 열린다는 하프마라톤에 이미 접수를 마친 상태였다. “소수 취소인원이 생겨 추가접수를 받는다”던, 지극히 홈쇼핑의 독려 멘트같던 그 안내에 홀려 갑작스러운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날부터 일주일에 20km를 넘게 뛰고 또 뛰었다. 그날그날 달라지는 온도를 느끼며 꽃향기와 낙엽내음을 헤치고 단단한 바닥에 걸음을 내딛는 것은 의외로 명상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회 당일, 맑고 추운 공기 속에 도심 한복판 21.15km를 달려 2시간 18분에 들어왔다. 아무렴, 사람을 움직이는 건 충동이다.
올해 만난 글귀
봄엔 헌책방에서 기형도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구했다. 존경하는 선배의 블로그를 염탐하다가 그가 ‘인생책’으로 꼽았던 이 절판본을 회기동에서 찾아내곤 뛸듯이 기뻤다.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의외로 맨 앞장, 표지 바로 다음의 맨 종이에 있었다. ‘1994(단기 4327) 9. 12. 제주에서’로 시작하는, 이 책의 원래 주인이 쓴 손글씨였다.
아래에 “그리고 2024년”이라고 덧붙여쓸지 고민하며, 꾹꾹 눌러쓴 볼펜 자국을 난 여러번 따라 읽었다.
남은 일주일 동안 하고싶은 일
올해 가장 후회한 일은 무엇이었어? 연락해야 했는데 내내 미루다가 아직도 못한 사람은 누구야? 올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어? 날짜가 드문드문 적힌 일기장의 빈 페이지를 펼치고 펜을 든다. 지금 아니면 쉽게 핑계를 만들기 어려운 일, “정말로 올 한 해는 어땠어?” 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는 대화를 자신과 주고받는 일.
새해의 첫 번째 대답으로 이어질 질문 꾸러미를 안고, 펜촉이 종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