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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엔 내 마음의 돛을 내리고…[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입력 | 2024-12-26 22:57:00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연말이면 불행해진다. 겨울이 되면서 맥없이 꺾여버린 잡초처럼 투지도, 즐거움도 없이 가만 침체되는 기분을 느낀다. 불행의 핵심은 불안이다. 내 일과 내년에 대한 불확실성과 아득함. 한 해를 열심히 달려온 것만으로 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뉴이어를 외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머리도 안 감고, 옷도 안 갈아입고, 딱히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기약 없는 내년만 머릿속에 붙잡아 두고 있었더니 종당에 손에 쥐는 것은 타이레놀. 연말에 그 하얀 알약을 먹는 기분은 정말 별로다. 몇 년째 도돌이표처럼 우울한 연말을 보내면서 이 루틴을 벗어날 방법을 모색 중인데 그중 하나는 ‘방바닥에서만 뒹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연말이면 가급적 방바닥에서 탈출하려 노력한다. 어제는 동거인이 수원에 안 갈래? 하고 묻길래 기꺼이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그녀 친구들의 전시가 열리는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자작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작은 함과 바구니, 책갈피와 가위집을 판매하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이 공예의 이름은 네베르슬뢰이드(N¨aversl¨ojd). 스웨덴어로, 네베르는 자작나무 껍질을, 슬뢰이드는 공예를 뜻한다. 예전 스웨덴의 가구 브랜드 이케아의 임원이 내한해 들려준 강연에서 메인 이미지로 보여줬던 털양말이 떠올랐다. 그들의 생활철학은 ‘라곰’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뜻하고 이 간소하고 편안한 적절함이야말로 행복의 비밀이라는 내용. 함께 보여준 이미지는 벽난로 앞에 놓인 털양말과 연말의 포근한 분위기가 물씬한 거실 풍경이었다. 친구들과 한 끼 행복한 식사를 하고, 저녁이면 조용히 ‘불멍’을 하고,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의 즐거움만 곱씹으며 행복하게 눈을 붙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할머니를 선생님 삼아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털양말을 꿰맨 기억과 순간이 라곰의 정서라는 설명도 기억난다. 손이 만든 온기 덕분에라도 전시장은 따스했다. 창문 안으로는 볕이 한가득 들어왔다(남향임이 분명했다). 봄 같았다. 전시에 참가한 한 분은 자작나무 공예를 ‘일상에 숨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했다.

전시장을 나와서는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었다.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곳일 텐데 오랜 세월이 흘러 생활 속으로 들어온 돌담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성곽길을 지나서는 행궁동으로 빠졌다. 드라마 ‘그해 여름은’의 촬영 장소로도 나왔던 곳. 동거인이 마침 그곳에 가보고 싶어 저장을 해 둔 카페가 있다고 했고 우리는 휴대전화로 지도 앱을 켜고 그곳으로 걸었다. 수원화성 천변과 그곳에 장군처럼 서 있는 수양버들을 지나 찾아간 ‘카페그루비’는 다시 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군데군데 간접등만 설치해 어둑한 실내. 오래된 오디오와 스피커, 나무 테이블과 의자, 책과 난로가 있는 그곳은 바깥 풍경이 아닌 안쪽 풍경을 가진 곳이었고 조용하고 어둑한 실내에서 스태프 분들은 커피를 내리고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곳이 좋았던 건 군데군데 1인용 테이블이 많았던 덕분이다. 혼자 온 사람을 배려하는 공간. 그곳의 주인은 혼자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묘한 충만감을 느꼈다. 카페에서 읽은 책 ‘흐르는 강물처럼’도 주문하고 운전석 옆자리에서 잠시 잠도 잤다.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버거움을 잊는 방법은 내 옆에 있는, 또 다른 세상 속으로 슬쩍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 아닐지. 막연한 내일의 슬픔 대신 선명한 오늘의 기쁨을 챙기고 그 시간 속에 가만 마음의 돛을 내리는 것을 연말의 새로운 루틴으로 삼아야겠다고 속으로 혼자 말했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