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친차제도 둘러싼 ‘새똥전쟁’ 새 배설물 수십m 넘게 쌓였던 섬… 작물 생장 돕는 비료 원산지 돼 페루, 英에 독점 수출해 부 쌓아… 스페인, 해병 400명 보내 섬 점령 페루, 칠레와 동맹 맺고 전쟁 선포… 스페인 실속 없이 흐지부지 종전
새똥 천지였던 페루의 친차 제도를 둘러싸고 남미 국가들과 스페인까지 얽힌 ‘새똥전쟁’이 발발했다. 영양이 풍부한 비료 ‘구아노’ 원산지에 눈독을 들인 스페인 함대는 1864년 4월 페루의 친차 제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위 사진). 미국도 구아노를 확보하기 위해 66개 섬을 미국 영토로 편입했다. 그중 하나인 미드웨이 환초의 항공 사진(아래 사진). 미국은 1942년 미드웨이 환초 인근 태평양에서 일본과 해전을 벌였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칠레가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한 이유는 에스파냐 식민지라는 과거를 공유하는 페루를 편들기 위해서였다. 페루는 1821년에 독립을 선포했지만, 에스파냐는 페루의 독립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1863년 에스파냐인 한 명이 페루에서 패싸움 끝에 죽자, 과학 탐사를 빌미로 근방을 떠돌던 에스파냐 태평양 함대가 페루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네 척으로 구성된 에스파냐 함대의 사령관은 콜럼버스의 항해를 함께했던 핀존 형제의 직계 후손이었다.
친차는 새똥 천지였다. 근처를 지나는 훔볼트 해류 덕분에 플랑크톤이 풍부했고 그 덕분에 멸치도 넘쳐났다. 멸치를 포식한 가마우지나 펠리컨 같은 새들은 친차에 똥을 원 없이 쌌다. 그렇게 쌓인 새똥은 두께가 수십 m가 넘었다. 안데스인들이 후아누 혹은 와누라고 부르던 새똥은 에스파냐어로 구아노가 되었다. 새옹지마랄까, 구아노는 질소의 보고였다. 예전부터 농부들은 똥과 오줌을 비료로 주면 작물이 잘 자란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이는 과학으로도 확인되었다. 가령 독일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1840년에 책을 써 충분하지 않은 질소가 식물의 성장을 제한하는 핵심 물질임을 밝혔다. 하루아침에 구아노는 보물단지로 변신했다.
1840년 페루는 구아노를 수출하는 독점 계약을 영국 깁스 일가의 해운 상사와 맺었다. 깁스 일가의 회사는 나중에 머천트뱅크, 즉 종합 금융 회사로 진화해 영국의 홍콩상하이은행에 인수됐다. 1840년대 페루 정부 세입의 5%를 이바지하던 구아노 수출은 1850년대엔 80%로 기여도가 폭등했다. 페루의 수도 리마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페루와 영국의 구아노 독점 거래를, 손톱을 물어뜯으며 바라보던 국가가 있었다. 미국이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구아노를 일부 수입하기는 했지만,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영국으로선 자신의 작물 생산량을 높이는 게 먼저였고 또 곡물이 주된 수출품인 미국의 부가 늘지 않도록 신경 쓴 측면도 있었다. 급기야 1856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구아노섬법에 서명했다. 구아노섬법은 미국인이 어떤 섬에서 구아노를 발견하면 그 섬은 미국의 영토가 된다는 괴이한 법이었다. 물론 ‘타국의 영토가 아니면서 타국인의 점유가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본심은 뻔했다. 이후 미국은 이 법으로 94개의 섬을 확보했고 그중 66개가 미국 영토로 편입됐다.
구아노섬법의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1942년 미국이 일본 제1 항공함대를 끌어들여 항공모함 간 결전을 벌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미드웨이 환초다. ‘둥근 숨은 바위’인 환초는 산호의 똥과 시체가 쌓인 결과다. 면적이 6km²에 불과한 미드웨이는 말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쿄까지 거리의 대략 중간에 있다. 미국은 미드웨이에 해군 비행장을 건설했을 뿐, 구아노를 캤다는 기록은 없다.
1865년 1월, 파레하는 친차를 돌려주는 대신 300만 골드 페소의 배상금을 받는 등의 조건을 담은 협상안을 최후 통첩했다. 페루 의회의 비준 거부에도 불구하고 파레하의 협상안을 수용한 페루 대통령 후안 안토니오 페세트는 얼마 후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에스파냐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걱정한 칠레는 자국의 항구에서 석탄을 보충하려던 에스파냐 군함에 판매를 거부했다. 파레하는 칠레의 최대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를 포위했다. 칠레는 전쟁 선포로 응수했다. 1866년 1월, 형세를 살피던 페루는 칠레와 동맹을 맺고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했다. 동병상련의 처지인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는 곧 에스파냐 함대가 남태평양에서 석탄을 구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칠레와 에스파냐 사이의 전쟁은 예상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865년 11월 26일, 영국기를 내건 칠레 해군의 프리깃 에스메랄다는 방심한 에스파냐 군함 한 척을 나포했다. 패전의 치욕을 견딜 수 없었던 파레하는 이틀 후 자살했다.
이후 전쟁은 흐지부지 끝났다. 에스파냐 함대는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있던 30척 이상의 칠레 상선단을 궤멸하고 페루의 카야오를 함포로 두들겼지만, 연료가 끊긴 함대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에스파냐 함대는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을 거쳐 1868년에 에스파냐로 귀환했다. 에스파냐는 1879년에 페루·볼리비아, 1883년에 칠레, 1885년에 에콰도르와 전쟁을 끝내는 평화 조약을 차례로 맺었다.
페루는 진즉에 친차 제도를 되찾았지만, 구아노로 인한 화양연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870년대까지 친차의 구아노는 거의 소진됐다. 1879년부터 1883년까지는 칠레의 침공으로 인해 구아노를 대신하던 초석의 산지를 잃었다. 그간 구아노와 초석을 팔아 번 돈은 소수 권력층의 소비 수준만 끌어올렸을 뿐이었다. 정말로 돈을 번 쪽은 페루 독립 때 돈을 빌려주고 전쟁 때 폭락한 광산의 채권을 헐값에 사서 소유권을 확보한 영국의 은행들이었다.
새똥 비료 ‘구아노’가 페루에서 유럽으로 대량 수출된 건 아일랜드 대기근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구아노에 묻어 온 세균 등의 원인으로 감자가 말라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기근 당시 굶주린 아일랜드 일가족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