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시 한민족역사문화공원 내 묘청상. 동아일보DB
이문영 역사작가
묘청 일당은 인종에게 스스로 황제라 선포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것을 청했는데, 인종도 이 말에는 따르지 않았다. 고려가 칭제건원을 하면 송이나 금이나 가만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종이 서경에 있을 때 큰 화재가 일어난 일이 있는데, 묘청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서경에 오면 태평성대가 올 것이라더니 왜 불이 났느냐고 따졌다. 묘청은 “주상이 개경에 있었으면 더 큰 화재가 일어났을 것인데 서경에 계셔서 이만하게 그친 것이다”라는 뻔뻔한 말을 했다. 하지만 묘청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그의 말에 감탄하며 더욱 그를 따랐다.
왕의 신임이 예전 같지 않자 묘청은 다급해졌다. 묘청은 1135년 음력 1월 4일 개경에 있던 제자 백수한이나 정지상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너무 성급한 행동이었다. 왕명을 사칭해 군사를 모으고 개경으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김부식은 즉각 정지상 등 묘청 쪽 인사들을 처형한 뒤 서경으로 출발했다. 다만 문공인은 처단하지 못했다. 문공인의 동생 문공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경에 조정의 대군이 도착하자 반란군은 당황했다. 급조한 반란군은 사기도 높지 않았다. 반란군 장군 조광은 묘청 등 지휘부 세 사람의 목을 베어 바치고 항복하고자 했다. 반란이 이렇게 순식간에 정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묘청의 잔당인 문공인이 조광이 묘청의 목을 바친 것은 김부식의 공이 아니라 자신의 공이라고 주장하면서 목을 가져온 조광의 부하를 옥에 가두고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문공인은 묘청과의 연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인데, 이것이 결국 조광을 자극했다. 묘청의 목을 바쳐도 살아날 수 없다면 얌전히 죽지는 않겠다며 성문을 닫고 반란을 이어 나간 것이다.
수뇌부만 처단하고 끝낼 수 있었던 일이 문공인이라는 공범을 놓치는 바람에 1년이 걸려서야 내란을 끝낼 수 있었다. 내란의 공범에는 단호하고 신속한 처형이, 그 외의 사람들은 살려준다는 분명한 태도가 필요했다. 반란군도 빨리 항복해서 살길을 찾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