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가르, 타이가르.”
12인승 승합차 운전사가 오른쪽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새벽 미명(未明)에 덜 깬 눈을 비비며 내다봤지만 어둠뿐이다. 운전석 뒤 탑승객이 “뭔가 길옆 수풀 속으로 움직인 것 같다”고 했다. 타이가르, 타이거(tiger), 호랑이였다.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 ‘사랑곳 전망대’로 일출을 보러 가는 꼬부랑 산길. ‘산신(山神)이 마중을 나온 건가….’ 2024년 12월 8일 오전 5시 50분을 막 넘어섰다.
지난해 12월 8일 동틀 녘 네팔 포카라 ‘사랑곳 전망대’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연봉.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 왼쪽 안나푸르나 1봉과 남봉 쪽이 연붉게 물들었다. 포카라=민동용 mindy@donga.com
표고(標高) 1600m에 육박하는 사랑곳 전망대 아래 주차장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해가 뜨려면 20여 분 남았다. 카페 주인이 전망대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말한다. “러키(운이 좋다).” 안나푸르나 산군(山群)을 숨겨 왔던 안개가 오늘은 진하지 않을 듯하다는 얘기다.
포카라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여행자 대부분이 출발하는 곳이다. 이 전망대에서는 해발 8091m 안나푸르나 1봉을 비롯해 7000m, 6000m급 연봉(連峯)을 볼 수 있다. ‘거기에 일출까지?’ 흐뭇한 상상에 빠지며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히말라야는 동서로 약 2500km 뻗어 있다. 그러니까 해가 히말라야 위로 뜨지는 않는다. 동쪽에서 떠오른 해는 봉우리들을 연붉은색에서 서서히 벌겋게 물들이다가 곧 중천으로 향한다. 다만 그런 날이 안개가 많이 끼는 지금 같은 건기(乾期)에는 드물다. 카페 주인 예상과는 달리 이날도 그런 것 같았다. 떠오르는 해도 먼지 같은 수증기 속에서 희미하다. 봉우리들은 안개가 감싸고 있다.
네팔 포카라 ‘사랑곳 전망대’에서 바라본 일출. 포카라=민동용 mindy@donga.com
네팔 포카라 ‘사랑곳 전망대’에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연봉을 바라본다. 가운데 뾰족 솟은 마차푸차레 왼쪽으로 안나푸르나 1봉과 남봉, 오른쪽으로 3봉, 4봉, 2봉이 각각 보인다. 포카라=민동용 mindy@donga.com
‘절대 존재’ ‘진리와 불멸의 상징’ 히말라야에서의 사투(死鬪)와 전망대에서의 조망을 견줄 순 없다. 엄 대장의 ‘산이 곧 나고, 내가 곧 산이다’ 같은 경지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1924년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실종된 영국의 조지 맬러리는 생전 인터뷰에서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질문에 “그것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했다. 소설 ‘신들의 봉우리’(유메마쿠라 바쿠 지음·이기웅 옮김·리리·2020년)에서 전설의 산악인은 답한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안나푸르나 산들 가운데쯤 삼각형 모양 마차푸차레(6997m)가 우뚝 서 있다. 네팔 말로 ‘물고기 꼬리’라는 뜻이다. 서쪽 안나푸르나에서 보면 봉우리가 꼬리지느러미처럼 ‘U’자 형태를 띠고 있단다. 네팔 정부는 ‘신(神)이 깃든 곳’이라며 등반을 금지하고 있다. 미답봉(未踏峯)이다. 카메라 줌을 당기면 봉우리 밑 움푹 팬 곳이 안온한 자궁처럼 보인다.
마차푸차레(6997m)가 동녘 빛을 받아 붉으스름해졌다. 포카라=민동용 mindy@donga.com
● 걷고, 돌고, 기도하고, 기다리다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랜만이다. 한라산(1950m)보다 높은 5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카트만두는 아침부터 매연이 자욱하다. 많은 사람이 길을 나선다. 사람과 차와 오토바이와 드문드문 자전거가 찻길에서 종으로 횡으로 북적거린다. 샛길과 골목길로 개가, 소가, 닭이, 양이, 원숭이가 부대낀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오토바이, 사람과 차가 닿을 듯 말 듯하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 도심 저 너머로 히말라야 설산이 보인다. 카트만두=민동용 mindy@donga.com
보다나트 스투파에서 사람들은 탑을 시계 방향으로 돈다. 보다나트의 ‘보다’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깨달음이 쉽지 않기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생각을 떨쳐내고 경전이 든 원통인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며 걷는다. 탑돌이는 “중심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주변을 걸으며 중앙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느끼는 동작”이다.(‘히말라야의 맹주 네팔 히말라야―카트만두 편’·임현담 지음·종이거울·2016년)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보다나트 스투파. 부처의 눈이 모든 고민과 번민과 불안을 꿰뚤어 보고 있다. 카트만두=민동용 mindy@donga.com
스투파 주위를 3층짜리 상가들이 둘러싼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도 1960년대에는 울타리 대신 2층 아케이드가 둘러싸고 있었다. 스투파를 에워싼 건물들이 낯설다. 건물들이 촘촘히 서 있다. 한 건물 외벽이 옆 건물 외벽과 붙어도 있다. 틈이 거의 없다. 신도 부대끼는 서민의 삶 속에 있는 것 같다.
보다나트 스투파를 에워싸고 있는 상가들. 촘촘히 붙어 있다. 카트만두=민동용 mindy@donga.com
말라 왕조의 유적 도시 바크타푸르. 카트만두=민동용 mindy@donga.com
말라 왕조의 유적 도시 바크타푸르에 있는 5층짜리 나타폴라 사원. 높이 약 30m로 카트만두에서 가장 높다. 카트만두=민동용 mindy@donga.com
●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12일 저녁 네팔에서 가장 큰 힌두교 사원인 파슈파티나트 사원 건너편 계단으로 육중한 검은 소가 걸어 올라온다. 시바 신이 사슴으로 변해 뛰놀았다는 사슴동산 쪽이다. 몇십 분 전까지 사원 입구에서 무언가 먹고 있던 소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은 성지(聖地)이자 화장터다. 사원과 사슴동산 사이로 카트만두 중심을 지나는 바그마티강이 흐른다. 강변에 화장대(火葬臺)들이 일렬로 놓여 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네팔 힌두교도라면 언젠가 이곳에 와야 한다. 죽음은 공평하다. 다만 상류에서는 돈 있는 자, 하류에서는 빈곤한 자가 태워질 뿐이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은 성지(聖地)이자 화장터다. 사원과 사슴동산 사이로 카트만두 중심을 지나는 바그마티강이 흐른다. 장례 행렬이 흰 천으로 감싼 시신의 발을 씻기기 위해 강가로 내려와 있다. 카트만두=민동용 mindy@donga.com
파슈파티나트 사원 화장대 장작 위에서 시신이 타고 있다. 카트만두=민동용 mindy@donga.com
카트만두·포카라=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