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NOW] 하이패션 디자이너의 단골 소재… 우아한 헤리티지 상징 모티프 디지털 프린팅으로 패턴 표현… 심플한 아이템과 매치해야 효과
을사년 푸른 뱀의 해가 도래했다. 뱀은 동양의 십이지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동물로 그려진다. 허물을 벗고 성장하는 모습에선 치유와 변화의 상징으로 통하기도 한다. 또한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하여 집에 들어온 구렁이를 절대 내쫓지 말라는 토속신앙이 있을 만큼 귀히 여겨진다. 어디 그뿐인가. 서양의 구약성서에선 이브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신비롭고 관능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고대 이집트 역사상 상징적인 유물 중 하나인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에는 코브라가 새겨져 있고,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에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몸에 뱀을 칭칭 감고 있는 조각품이 전시돼 있을 만큼 뱀은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이렇듯 뱀을 향한 갈망은 일찍부터 패션계에서도 감지됐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1837년 즉위식에서 착용한 팔찌와 1839년 앨버트 왕자로부터 받은 약혼반지에는 모두 뱀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 남다른 금실을 자랑한 여왕 부부에게 뱀은 영원한 사랑의 증표이자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성행한 뱀 모티프 주얼리는 아르누보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명 프랑스 예술가인 르네 랄리크와 조르주 푸케에 의해 더욱 다채로운 주얼리로 거듭났고 상류층에서는 이 유행을 충실히 따랐다. 뱀의 비늘을 재현한 육각형 패턴과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미는 오늘날의 불가리, 부쉐론, 카르티에 등 역사 깊은 주얼리 하우스의 창조적 영감으로 이어졌다. 뱀의 가죽을 덮고 있는 각각의 비늘이 모여 이국적인 장관을 만들어내는 파이선 패턴은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의 단골 소재였다. 일례로 구찌는 뱀 모티프를 디자인에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며 1990년대 패션계를 호령했다. 비단뱀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파이선 패턴 백부터 의류와 액세서리까지 애호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구찌의 미학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럭셔리의 정수로 불리던 파이선 패턴이 대중적 인기를 누린 건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에이브릴 라빈 등 당대 스타일 아이콘으로 추앙받던 팝스타들의 파이선 패션이 한몫했다. 수천 년의 역사 속 뱀은 우아한 헤리티지를 상징하는 모티프에서 계절을 막론하고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본격적인 유행의 궤도에 올랐다.
뱀의 해를 맞이해 패션계에서는 ‘파이선’ 패턴에 주목하고 있다. 루이뷔통은 파이선 패턴을 픽셀화한 슈트를 통해 쿨하고 젊은 감각을 보여줬다(왼쪽 사진). 보테가베네타는 섬세한 시퀸 장식으로 부드럽고 반짝이는 우유뱀의 비늘을 표현한 레드 드레스로 눈길을 사로잡았다(가운데 사진). 발렌티노는 아르누보 양식과 조화를 이룬 고전적 스타일을 선보였다. 사진 출처 각 브랜드
자칫 과할 수 있는 파이선 패턴은 심플한 아이템과 매치해야 스타일리시해 보인다.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캐주얼한 아이템을 섞는 것도 현명한 방법. 켄들 제너, 두아 리파, 케이티 홈스 등 젠지 사이에서 핫한 셀럽들처럼 파이선 패턴 톱과 아우터에 데님 팬츠를 매치하면 무심한 듯 시크한 스타일링이 완성된다.
패션계가 파이선 패턴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어려운 시국을 헤쳐나갈 지혜로운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푸른 뱀의 해를 맞아 파이선 패턴을 휘감고 기분 전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매일 입는 옷이라는 매개체는 때론 스스로를 감싸안고 위로하는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니까.
안미은 패션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