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내가 태어난 게 아닙니다. 껍질을 깨고 나온 색깔 없는 팔색조가 고통으로 울지만, 인생은 벌써 알록달록한 아홉 가지 색깔을 마련해 두었다.”
―박판식 ‘전락’ 중

조성래 시인
그러나 결핍은 그나마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한 문제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마련해 둠으로써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괴로움도 준다. 동시에 들이닥치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 우리는 단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한 점 위에 놓인 찰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일을 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의 감정이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마련해 두었기에 일어나는 좌절일 것이다. 이 좌절의 다른 이름은 자유일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해 두었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에 관해 천착한다. 또한 우주는 한 인간에 대해, 혹은 전 인류에 대해 얼마나 과잉한가? 2023년 7월 1일에 발사된 유클리드 망원경이 포착해 낸 우주 지도의 1%에는 무려 1400만 개의 ‘은하’가 들어 있다고 한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시절, 빈 영수증 뒷면에 ‘신은 한 사람이 다 못 누릴 만큼의 많은 것을 그의 생에 마련해 두었다. 그가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할 만큼의’라는 문장을 써 놓은 적이 있다. 아마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박판식 시인의 문장이 발화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성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