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정 경제부 차장
“우리 가상자산 시장은 닫혀도 너무 닫혀 있다. ‘쇄국(鎖國)’이라고나 할까.” 이제 자리서 물러난 한 전직 관료는 지난해 사석에서 가상자산 시장을 둘러싼 걱정을 전했다. ‘투자자 보호’ ‘안정’을 우선으로 하는 관료들의 고민도 이해하지만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과의 간극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우려였다. 보수적인 전직 관료에게서 나온 의외의 발언에 내심 놀라며 흘려넘겼는데, 가상자산이 해외 주요국에서 빠르게 제도권 금융자산으로의 위상을 확보해 나가는 것을 보면 기우는 아니었다 싶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해 1월 자산운용사 11곳의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에 대한 거래를 승인했다. 이후 개인들뿐만 아니라 기관투자가들까지 투자에 뛰어들면서 불과 1년 만에 비트코인 현물 ETF의 운용자산 규모는 금 ETF 운용자산과 버금가는 규모로 불어났다. 굵직한 기업들은 물론이고 연기금들도 가상자산으로 돈을 굴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크립토 대통령’을 자처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으로 가상자산 시장은 또 한 차례 급물결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화폐 가치에 연동되는 스테이블 코인으로 ‘달러 패권’을 강화하려는 트럼프는 취임 4일 만에 대통령직속 가상자산 워킹그룹을 신설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반면 국내 가상자산 시장 관련 제도는 지난해 투자자 보호와 가상자산 거래소 관리·감독에 방점이 찍힌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 시행 이후 큰 진전이 없다. 법인들의 투자도, 현물 ETF 모두 막혀 있다. 시장에서는 규제 완화 여부를 떠나 정부가 가상자산 산업 정책 수립과 인프라 개선에 관심 자체가 크지 않다, 논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불만이 흘러나온다. 실제로 20페이지의 금융위원회 2025년 주요 업무 추진계획 자료에서도 가상자산에 할애된 부분은 “법인의 거래소 실명계좌 발급의 단계적 허용을 검토하고 글로벌 규제 정합성 제고를 위한 2단계 법을 추진”하겠다는 등의 한 단락이었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가상자산위원회는 현재까지 두 차례 회의를 열어 제도 도입을 논의했다.
물론 새로운 투자 섹터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며 투자자 보호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러나 그를 감안하더라도 가상자산 제도화 광폭 행보를 벌이는 선진국들과의 간극이 지나치게 벌어지고 있다.
그나마 반가운 것은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국내 가상자산 관련 정책 변화 가능성에 대해 “조금은 보폭을 더 빠르게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 수는 이미 약 1559만 명(5대 거래소 계정을 보유한 투자자, 계정 중복 합산)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돈의 물줄기를 막을 수 없는 만큼, 해당 자산의 특성과 글로벌 시장의 흐름에 발맞춘 제도적 논의가 절실하다. 신중론에 갇혀 각국의 가상자산 제도화 속도전에서 뒤처지다 몇 년 뒤 지금 이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장윤정 경제부 차장 yun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