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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사연[이준식의 한시 한 수]〈302〉

입력 | 2025-02-06 23:09:00


뜰 안 오래된 오동나무 한 그루,
우뚝한 줄기는 구름까지 닿을 듯.
가지는 남북에서 날아드는 새들을 맞고,
잎사귀는 오가는 바람을 배웅하네.
(庭除一古桐, 聳幹入雲中.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우물가 오동나무(정오음·井梧吟)’ 설도(薛濤·768∼832)


이 소박한 풍경화 속에는 억울한 사연이 하나 숨겨져 있다. 시는 아버지가 앞 2구를 읊고 딸 설도가 뒤를 이어 완성했다고 한다. 정원의 나무를 바라보며 부녀 간에 흔하게 오갈 법한 대화이지만 놀라운 건 당시 설도의 나이가 여덟, 아홉이었다는 것. 나이에 비해 시적 순발력은 가히 천재적이다. 아버지는 우람한 줄기에 감탄을 보냈고 딸은 그에 호응하여 가지와 잎사귀 묘사로 시를 마무리한다.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아버지의 반응. 딸의 시구에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날아드는 새들을 맞고, 오가는 바람을 배웅하네’라니, 만약 여자의 일생이 이런 식으로 흐른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걱정했다는 것이다. 하나 아무래도 이건 아버지의 과잉반응 같다. 일상적인 자연 풍경을 포착한 딸의 천진한 발상을 이렇게 왜곡할 수 있단 말인가. 혹 훗날 그녀가 악기(樂妓)가 되어 문인들과 염문을 뿌린 행적을 염두에 두고 억지로 꾸며낸 얘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일화를 기록한 건 송대 장연(章淵)의 ‘고간췌필(槁簡贅筆)’. 소설, 야사, 풍문 따위가 혼재되어 있어서 진실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시 이해에 다소 도움은 될지언정 시인의 재능을 왜곡할 수도 있는 누명은 해명되어야겠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