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동원된 마약의 용도 2차대전 침공 선봉에 獨 ‘유령 사단’… 24시간 240㎞ 진격 뒤엔 페르비틴 연합군도 조종사 등에 각성제 먹여 美남북전쟁선 모르핀 ‘회피처’ 삼아… 淸에 아편 수출 노려 전쟁 일으킨 英 美, 반군 지원하려 돈-코카인 거래도
독일군 7기갑사단 지휘관인 에르빈 로멜(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6월 프랑스 서부에서 전황 브리핑을 받는 모습. 7기갑사단은 무시무시한 진격 속도로 ‘유령 사단’으로 불렸는데 병사들이 페르비틴에 취한 결과이기도 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7기갑사단의 무시무시한 진격 속도는 로멜이 부대의 맨 앞에 선 게 한 가지 이유였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전격전으로 유명함에도 사실 로멜의 원래 병과는 보병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인 1917년, 중위였던 로멜은 휘하 산악 보병 중대로 이탈리아군 2개 사단을 포로로 잡는 믿기지 않는 전과를 거두었다. 로멜은 자신의 보병 전술을 다룬 책을 1937년에 내기도 했다. 기갑 장교로 훈련되지 않은 로멜은 전차를 가혹하게 다뤘다. 즉, 기갑 장교라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차량의 정비와 보급을 로멜은 가볍게 무시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의 전신인 미국 제약회사 스미스클라인앤드프렌치는 1932년 ‘벤제드린’이라는 이름의 약을 팔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천식 치료제였지만 운동 선수가 기록 향상을 위해 먹는 약이기도 했다. 벤제드린의 성분은 1887년 루마니아의 라저르 에델레아누가 최초로 합성한 암페타민이었다.
독일 제약회사 템러가 1937년 메스암페타민 합성에 성공한 뒤 시판한 ‘페르비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에게 공급됐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베를린 소재 군사의료학교의 오토 랑케는 대학생 90명을 대상으로 페르비틴을 투여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육체의 피로와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묘약이라는 실험 결과에 고무된 랑케는 날마다 페르비틴을 먹기 시작했다. “피로를 느끼지 않고 36시간에서 50시간을 계속 일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1938년 체코 합병 때부터 독일 군인들에게 페르비틴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전격전은 병사들이 페르비틴에 취한 결과이기도 했다. 독일군 기갑 부대의 대부인 19군단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휘하 부대에 “필요하다면 제군들이 적어도 3박 4일 동안 잠 없이 전진하기를 요구한다”고 명령했다. 7기갑사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은 전투기 조종사나 전차병들이 페르비틴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페르비틴 범벅인 초콜릿도 나눠 줬다.
메스암페타민을 병사들에게 먹인 건 독일만이 아니었다. 1888년 도쿄제국대의 나가이 나가요시는 에델레아누와 별개로 암페타민을 발견했다. 1919년 같은 대학의 오가타 아키라는 메스암페타민을 결정 형태로 얻었다.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일본군은 메스암페타민을 배급받았다. 오늘날 스미토모파마의 전신인 다이닛폰제약은 1941년 민군 겸용의 메스암페타민을 내놓았다. 그 제품명이 ‘근로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로포노스를 줄인 필로폰이었다.
1970년 미국의 살 빼는 약 ‘오비트롤’ 광고로, 메스암페타민 성분의 각성제는 미군, 영국군 등에도 쓰였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838년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선제적으로 예방한다는 생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어 건조한 고산 지대에서 잘 자라는 양귀비를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량으로 키웠다. 당시 영국은 청의 차를 엄청나게 수입한 반면 청에 팔 물건이 마땅히 없었다. 그렇게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른 아편은 청에 밀수출하기 좋은 영국의 효자 상품이 되었다.
아편 중독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1839년 청은 밀수된 영국의 아편을 압수해 불태웠다. 기회만 노리던 영국은 이를 빌미로 1840년 청을 침공했다. 바로 1차 아편전쟁이었다. 1842년 1차 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청은 홍콩섬을 영국에 빼앗겼다.
전쟁에 승리했지만 청에서 아편의 유통이 생각만큼 늘지 않자 영국은 호시탐탐 또 다른 구실이 생기기만 기다렸다. 1856년 청은 해적들이 탄 배 애로호를 단속했다. 애로호의 선장이 영국인이고 단속 중에 영국 국기가 모욕됐다는 걸 꼬투리 삼아 영국은 청을 상대로 또 다른 전쟁을 시작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더 이상 청에는 자국 내의 아편 밀수와 유통을 막을 힘이 남아 있질 않았다.
2차 아편전쟁 때 숟가락을 얹은 미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아편에 입맛을 붙였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치른 남북전쟁 때문이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었던 이 내전에서 부상자는 물론이고 멀쩡한 군인들도 아편을 들이켰다. 아편을 먹으면 두려움과 취약하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이유였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영국보다 더 창의적인 마약 활용법을 찾아냈다. 1979년 니카라과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3대에 걸쳐 대통령을 이어받은 독재자 가문 소모사가 쫓겨났다. 소모사 가문의 뒷배였던 미국은 소모사 가문의 잔당인 콘트라에 예전처럼 돈을 보내줄 방법이 없었다. 1982년 미국 의회에서 볼랜드 수정 법안이 통과되면서 니카라과 현 정부 전복 목적의 콘트라 지원이 금지된 때문이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국 해병대 중령 올리버 노스는 ①이란에 무기를 몰래 팔아 돈을 마련하고 ②그 돈을 콘트라에 주면서 ③콘트라가 농부들에게 기르게 해서 걷은 현물 코카인을 받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당시 미국은 이란을 선제 침공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원하던 중이었다. 콘트라로부터 받은 현물 코카인은 중앙정보국(CIA)이 미국 국내에서 유통해 비자금을 만들었다. 노스의 방안은 1986년에 들통날 때까지 실제로 수행되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