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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걸린 게 불운이 아니라 암에 안 걸리고 살아온 하루하루가 기적”[월요 초대석]

입력 | 2025-02-09 23:15:00

20년째 암과 씨름해온 김범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
16세에 아버지 폐암으로 잃고 의대 꿈… 암 공부할수록 인간 진화 닮은 생명현상
치명적인 세포 돌연변이의 결과가 암… 세포 30조 개 매일 분열, 오류 불가피
획기적 예방법 다 알지만 잔소리 취급… 아버지가 내 환자라면 ‘담배 끊으세요’
암은 노화와 장수의 자연스러운 부산물… ‘암은 남 일’ 선 긋고 산 환자들 더 충격



4일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 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유가족이자 암을 치료하는 의사로 20년째 일해온 그는 그간의 경험을 담은 책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를 최근 출간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암 환자들을 만나는 종양내과 의사는 초면에 임종을 얘기해야 할 때가 적지 않은 직업이다. 주로 암 수술 후 재발했거나 암이 너무 늦게 발견된 환자들이 항암치료를 위해 종양내과로 찾아온다. 저승길에서 유턴해 온 이들도 있다. 서울대병원 암센터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48)는 “의사와 장의사 사이에 낀 저승사자로 살아가는 기분”이라고 한다. 김 교수의 환자들 중에는 완치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생명을 연장하고 증상과 통증을 완화하는 게 치료의 목적이다. 4일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김 교수는 “암 환자들이 남은 삶을 편안히 살아가도록 시간을 버는 게 제 일”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병동에서 환자들의 어린 자녀를 볼 때면 한결 더 마음이 쓰인다. 그 역시 16세 때 아버지를 폐암으로 잃었다. 당시 아버지는 지금 김 교수 나이인 40대 후반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김 교수는 암을 증오하면서도 정복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그를 종양내과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의대에 가기엔 성적이 부족했던 그는 “의자 방석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공부했다”고 한다.

20년째 암과 싸워 오면서 암에 대한 김 교수의 시선도 달려졌다. 초기엔 암을 제압하겠다는 의욕이 높았지만 암을 알아갈수록 그 역시 하나의 생명체라는 생각에 가까워졌다.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이해와 예방의 대상으로 암을 바라보게 됐다. 그는 암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자 암을 치료하고 연구하는 의사로 살아온 그간의 기록을 최근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란 책으로 펴냈다.

―암은 무엇인가.


“우리 몸에 30조 개 세포가 끊임없이 복제되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세포의 DNA에 치명적인 돌연변이가 생겨 암세포로 변한다.”

―암세포는 왜 위협적인가.


“정상 세포는 사멸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데 암세포는 사멸하지 않고 무한 증식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로 신호도 무시하고 질주하는 자동차에 빗댈 수 있다. 주변 세포들의 영양분을 마음대로 끌어다 쓰고 정상 세포들의 생태계를 교란한다. 그 결과 해당 신체 기관을 무력화시키고 다른 장기로도 퍼져나가 못 쓰게 만든다.”

―암은 악당인가.

“시각을 조금 바꿔 보면 암은 필연적인 생명 현상이다. 인류가 생존하고 진화해 온 특징은 암의 생존법과 동일하다. 인간은 스스로 후손을 이어 왔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적응해 왔다. 생존을 위해선 주변에서 자원을 빼앗기도 하고 영역을 넓혀가며 번영을 이뤄 왔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게 딱 암의 생존법이다. 태아 역시 엄마 배 속에서 암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정말인가. 암은 절망이고 태아는 희망 아닌가.

“모체의 면역계는 본래 태아를 외부자로 인식하지만, 태반에 면역 회피 물질이 있어 태아를 보호한다. 암세포 역시 면역 회피 물질을 내며 면역계를 교란시키고, 이를 통해 몸의 방어체계가 자신을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또한, 태아는 엄마의 영양 상태와 관계없이 영양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호르몬을 분비한다. 덕분에 엄마의 영양 상태가 불규칙하더라도 태아는 문제없이 성장할 수 있다. 암세포도 주변 세포의 상태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영양분을 확보하는 데 집중한다.”

―암이 안 생기게 돌연변이 자체를 막을 순 없나.

“세포 복제 과정에 오류가 전혀 없다면 변이가 안 생겨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진다. 그렇게 진화가 멈추면 환경 변화에 대응할 능력이 떨어져 멸종될 수 있다. 종이 존속하려면 어느 정도의 오류가 필요하다. 암이 생길 수 있는 몸이기에 생명체가 여기까지 진화한 것이다.”

―암은 우리의 적이 맞나.


“그토록 없애버리고 싶은 암은 변형된 우리 자신이다. 암과의 싸움이 힘든 건 수만 년 진화를 통해 인간의 몸에 누적된 세포 증식 능력과 생존력을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잘 대응하면 치료할 수 있는 암도 많다. 말기 환자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증상을 줄이는 치료법이 계속 나오고 있다. 다만 항암치료가 발전하는 만큼 암 역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진화한다.”

―암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암은 인간이 오래 살게 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다. 암은 어찌 보면 장수의 부산물이다. 수십 년 세포 분열이 반복되면 고장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현재 평균 수명(82세) 정도 산다고 하면 30% 정도가 평생 한 번 이상 암 진단을 받게 된다. 수명이 90세로 연장되면 그 비율이 60%까지 높아질 수 있다.”

―그래도 암에 걸리면 절망스러울 것 같다.


“많은 환자들이 ‘왜 나한테만 이런 불행이 생기느냐’고 한다. 하지만 암에 걸린 게 불운한 것이라기보다, 암에 안 걸리고 산 하루하루가 행운의 연속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30조 개의 세포가 복제되면서 매일 9600억 개의 오류가 생긴다. 이 중 치명적인 부위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암이 된다. 그럼에도 세포들이 수십 년간 조화롭게 유지되고 있다면 그 자체가 경이로운 일 아닌가. 우리는 단순히 살아있다고 표현하지만 암이 생기지 않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건강은 당연한 게 아니다.”

―암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암이 주로 생기는 부위는 위벽이나 장벽, 폐 속 같은 부위의 상피세포다. 술, 담배, 음식물 등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과 직접 맞닿는 곳이다. 뇌가 우리 몸의 지도층이라면 상피세포는 발암물질에 노출된 고단한 삶을 사는 하층민이다. 뇌는 명령을 내릴 뿐 그로 인한 결과는 상피세포가 감당한다. 발암물질의 공격으로 세포들이 궁지에 몰리면 돌연변이를 통해 위기를 넘기려 한다. 그 과정에서 암세포가 생겨난다.”

―암은 세포가 살려고 발버둥을 친 결과인가.

“그렇다. 암세포가 처음부터 암세포였던 건 아니다. 암을 용서할 순 없지만 공부하다 보면 암세포에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 몸을 잘 보살펴야 하는 것인가.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세포들 덕분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적어도 내 몸이 싫어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암을 부르는 ‘못할 짓’이란 어떤 것들인가.

“암 예방 10계명은 노화를 늦추는 10계명과 같다. 요즘 혈당 스파이크란 말을 흔히 쓰는데 고혈당 습관은 노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세포에 계속 충격을 주는 것이어서 돌연변이 확률도 높인다. 사람이 안 늙을 순 없지만 천천히 늙는 것은 가능하듯, 암을 100% 막을 순 없지만 발병 확률을 60∼70%가량 낮추고 암이 생기더라도 최대한 늦게 생기게 할 방법은 있다. 담배 안 피우기, 소량의 음주도 피하기,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짜거나 탄 음식 안 먹기, 주 5회 이상 하루 30분 넘게 땀 날 정도로 운동하기 같은 것들이다.”

―이미 다 아는 것들 아닌가.


“그래서 획기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 획기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만약 제 아버지가 환자로 온다고 해도 저는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담배 끊으세요.’”

―우리는 왜 알고도 실천을 안 하는 걸까.

“예방의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암에 안 걸린 게 예방 노력 덕분인지 원래 건강해서 그런 건지 구별이 어렵다. 사람들은 건강한 게 당연하다고 전제하고 있어 예방이 나를 지켜준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항암제가 나오면 환자도 좋고 의사도 좋고 제약사 주가도 오르기 때문에 모두가 반기는데, 정말 획기적인 예방법은 다들 익히 알고 있다며 잔소리로 여긴다.”

―예방 노력을 해도 암에 걸릴 수 있지 않나.


“우리 인생이 그렇듯 암 발생에도 어느 정도는 우연과 불운이 작용한다. 하지만 예방법을 꾸준히 실천하면 암 발생 확률을 확실히 낮출 수 있고 암에 걸리더라도 체력이 좋아서 암 치료를 잘 견딜 수 있다. 체력이 안 좋거나 노쇠하면 아무리 암이 작고 초기여도 치료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암에 안 걸릴 것’이란 인식이 많은데….

“가장 경계해야 할 인식이다. 암은 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일이고, 암 환자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며 선 긋기를 하면 예방에 소홀해지고 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 쉽다. 암을 남 일 취급했던 사람일수록 암에 걸리면 더 큰 충격을 받고 후회, 부정, 분노의 과정을 겪으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암을 두려워만 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늦게 발견할 확률이 높아지고, 그 결과 더 힘들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게 암에 대한 두려움을 더 키우는 악순환에 빠진다.”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란 김 교수의 책 제목은 그런 선 긋기를 경계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정상 세포가 언제든 암세포로 변화할 수 있듯 삶과 죽음은 이분법적 직선으로 나누어진 게 아니라 경계가 모호한 채로 연결되고 순환한다는 것이다. 암을 저편의 존재로 보지 말고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김 교수의 환자들 중에는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느라 소중한 현재를 낭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환자들일수록 삶을 지레 포기하거나 무의미한 치료에 매달리기 쉽다. 임종 준비 기간이 미국은 보통 6개월인데 우리는 소모적인 치료에 집착하다 삶을 마무리할 시간을 채 한 달도 갖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항암치료 전문의인 김 교수가 존엄한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런 안타까움 때문이다.

“이제 임종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해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환자들이 많다. 현실적인 한계도 있겠지만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게 뭔지,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환자들을 보며 저 역시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삶과 죽음에 대해 배운 것들을 널리 공유하는 것이 저에게 부여된 소임인 것 같다. 암과의 싸움은 늘 버겁고 환자를 잃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패배가 예정돼 있다고 해서 의미 없는 싸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이유로 우리의 현재 삶이 의미 없진 않듯이.”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