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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칼럼]이재명의 변신 어디까지 진짜일까

입력 | 2025-02-09 23:21:00

“재벌체제 해체” vs “기업성장이 국가발전”
어느 쪽이 진짜 이재명?
‘주 52시간 예외’ 공감 표하더니 백지화하나
“삼성전자급 기업 6개 육성” 무슨 수로?



천광암 논설주간


“지금 대한민국을 틀어쥐고 있는 거악은 정치권력조차 쥐락펴락하는 경제권력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재벌 체제 해체에 정치생명을 걸겠습니다.”

“(지금은)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고, 기업의 성장 발전이 곧 국가경제의 발전입니다.”

앞은 2017년 1월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지지자들이 모인 ‘손가락혁명단 출정식’에서 했던 말이다. 뒤는 지난달 23일 이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다. 두 발언 사이에 놓인 8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을 감안하더라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는 발언들이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대표의 ‘우클릭’이 올 들어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당 대표 연임 도전에 나서면서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여야 한다”며 ‘먹사니즘’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강도가 세진 것만은 분명하다. ‘먹사니즘 선언’ 때만 해도 자신의 간판 정책인 ‘기본시리즈’에 집착과 미련을 보였지만, 이제는 이것마저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달 3일 ‘반도체 산업 주 52시간 근로 예외’와 관련한 토론을 이 대표가 직접 주재한 것도 이목을 끌 만한 장면이었다. 노동계의 반발이 예상되는데도 이 대표는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더라”며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까지 했다.

이런 이 대표의 행보에 ‘중도 확장’을 통한 집권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민주당의 이른바 집권플랜본부가 이 대표의 성장 담론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발 벗고 나선 것도 한 방증일 것이다.

민주당 집권플랜본부가 6일 개최한 세미나에서 제시된 이 대표 집권 후 경제 청사진은 한마디로 ‘장밋빛’이다. 1%대인 경제성장률을 5년 내 3%대, 10년 내 4%대로 끌어올리고 삼성전자급 ‘헥토콘 기업’ 6개를 육성하겠다고 한다. 말대로 된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이를 담보할 만한 구체적인 정책이 있는지,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 간단한 예로 ‘헥토콘 기업 6개 육성’만 놓고 한번 생각해 보자. 헥토콘 기업이란 기업 가치가 100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을 말한다. 미국의 리서치기관인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작년 12월 17일 기준으로 이런 기업은 전 세계에 3개뿐이다. ‘숏폼 동영상 신드롬’에 불을 붙인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 우주개발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스페이스X, 그리고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두말할 나위 없는 선두 주자로 입지를 굳힌 오픈AI다.

이런 기업을 3개도 아니고 6개씩이나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자면 창의성으로 이런 기업을 능가하거나, 창의성이 달리면 최소한 부지런함으로라도 이런 기업들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헥토콘 기업 중 하나인 스페이스X의 경영자 일론 머스크의 경우 스스로는 주 120시간을 일하면서, 회사 핵심 인재들에게는 주 80∼10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AI시대의 총아로 등극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나는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한다. 1주일에 7일간 일한다. 일하지 않을 때는 일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했다. 당연히 이런 CEO 밑에서 일하는 엔비디아의 핵심 인재들이 주 7일, 때로 밤 1∼2시까지 일하는 것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런 기업들과 경쟁하거나 협업하기 위해서 우리 기업계가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 52시간 근로 예외’다. 근로시간을 늘리자는 것이 아니다. 주 52시간 틀은 지키되, 반도체 등 일부 업종의 R&D 등 직군의 억대 이상 고연봉자에 한해 회사와 근로자가 합의하면 한꺼번에 몰아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앞서 주 52시간 관련 토론회의 발언을 보면 이 대표는 이런 취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론회가 열린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민주당은 ‘주 52시간 예외’ 입법을 ‘백지’로 돌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선택은 자유겠지만, 그 선택이 ‘이 대표의 변신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이 대표가 앞세운 실용주의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지’ 등 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