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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정신질환자 보호입원 급한데… ‘보호자와 석달 거주’ 규정에 막혀

입력 | 2025-02-11 03:00:00

25년 억울한 수감뒤 불안증 김신혜, ‘환자 거주 요건’ 못채워 입원 거절돼
‘망상 폭력’ 환자들 응급입원 못시켜… 안인득 ‘5명 살인’ 참사 부르기도
“법원이 판단 ‘사법입원제’필요” 지적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살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지난달 6일 25년 만에 출소한 김신혜 씨(48).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라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 그런 김 씨가 보름 뒤인 21일 고향인 전남 완도에서 약 350km 떨어진 서울 강남구 삼성역 근처에서 발견됐다. 출소 후 심한 불안과 망상을 앓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실종신고로 약 하루 만에 발견된 김 씨는 관할 파출소에서 ‘나는 북한에 가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망상 증세가 심각해지자 김 씨의 남동생과 담당 변호사는 김 씨를 국립 정신의료기관에 보호입원시키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보호자-환자 3개월 이상 동일 주소 거주’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환자 못 받는다”, 거절 사례 빈번

김 씨처럼 정신질환자에게 주민등록상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와 오래 떨어져 살았던 경우 보호입원이 어려워 당사자와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신건강증진법상 정신질환자의 보호의무자는 환자의 직계혈족이나 배우자, 그 외 형제자매나 친인척 등이 될 수 있다. 다만, 직계혈족과 배우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최근 3개월 이상 환자와 같은 주소에 거주해야만 보호의무자가 될 수 있다.

10일 동아일보가 전국 정신의료기관 20곳을 취재한 결과 ‘3개월 이상 동일 거주지 요건’을 못 채워 보호입원을 거절당한 사례가 16곳에서 나왔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은 최근 경기 부천의 한 정신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으려 했다. 그의 형과 누나가 이 병원을 방문했지만 두 사람 모두 3개월 동일 주소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입원하지 못했다. 조현병 환자 가족 모임 ‘가족은 바꿀 수 없다’ 운영자는 “환자의 형제자매가 부양 요건을 갖춰서 보호입원을 신청했는데 ‘이미 이혼해서 소식도 모르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직접 와서 신청해야 한다’며 입원이 거절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보호입원을 거절당한 보호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정신질환자가 본인이나 남을 해치는 극단적인 상황이다. 한 정신의료기관 관계자는 “심한 망상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우려가 큰 환자가 있어도, 아직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서 응급입원도 못 시키는 경우가 한 달에 한두 번꼴로 발생한다”고 말했다. 2019년 경남 진주시 아파트에서 흉기를 휘두르고 불을 질러 5명을 숨지게 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안인득은 사건 발생 2주 전부터 형제들이 정신의료기관에 입원시키려 했으나 요건을 채우지 못해 입원이 무산됐다.

● “기준 개선 필요, 사법입원제도 검토할 만”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보호입원 거절 통계는 별도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신고 이전에 입원 요건 미충족 등을 사유로 입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별도로 집계하지 않는다. 의사나 경찰관의 동의를 받아 최장 3일까지 정신의료기관에 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있는 ‘응급입원’도 해마다 입원을 거절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경찰청이 서명옥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응급입원 반려 건수는 2020년 385건에서 2023년엔 1050건으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도 837건이 반려됐다.

전문가들은 재산을 노리고 가족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사례가 많았던 탓에 ‘3개월 이상 동일 거주지 요건’이 생겼기 때문에 이를 일률적으로 없애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만 환자나 보호자마다 처지가 다른데 하나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유럽 등에서 법원이 정신질환자의 상태를 검토해 입원 여부를 판단하는 ‘사법입원제’를 시행 중인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조성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환자와 가족마다 상황이 제각각인데 3개월 같은 주소지라는 일관된 기준을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사법입원제 같은 시스템으로 환자를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 의원은 “정당하지 않은 사유로 보호입원을 거절당하는 경우가 없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조승연 기자 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