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꿈을 꺾는 행정

  • 입력 1996년 11월 11일 20시 19분


찬 바람이 잎들을 벗겨내고 가을도 깊어지고 있다. 벌써 한 해의 황혼, 96년도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을 뿐인가. 겨울의 문턱에서, 봄볕아래 싹 틔우고 여름 태양아래 피우겠다던 다짐들의 열매를 더듬게 된다. 개인이건 나라건 부푼 꿈과 포부로 나설 때를 반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지난 2월, 파릇한 새싹처럼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이라는 것이 고개를 내밀었다. 정부가 스스로 법을 만들겠다며 싹 틔운 논리와 이유들은 앙증맞도록 아름다웠다. ▼ 가슴 설레었던 科技특별법 ▼ 21세기에 대비해 앞으로 5년간 정부의 연구개발투자 비중을 「획기적으로」 늘려 총예산중 5%까지 확대하기로 특별법에 정한다, 중소기업은 「진짜로」 기술만 담보 잡혀도 돈을 빌려쓰게 해준다, 기술개발을 위해 세금 금융 혜택을 더 늘린다, 그런 청사진이었다. 정부가 스스로의 잘못을 자백도 했다. 우리나라 전체 연구개발(R&D)투자비 가운데 정부몫은 91년 20%, 92년 18%, 93년 17%, 93년 16%로 계속 내려가고 있다는 발표였다. 국가R&D규모 가운데 정부 비중을 25%까지 늘리기 위해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복음이었다. 드디어 이 가을, 정기국회에서 법이 여물어가고 있다. 그러나 웬걸, 공청회 거치고 부처간 협의를 진행하면서 물기와 영양가는 다 빠지고 쭈그렁 밤송이가 되고 있다. R&D투자에 관해서도 총예산의 5%는커녕 「정부의 투자 비중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립서비스 뿐이다. 물론 처음부터 과기처가 과학기술계의 「희망사항」을 너무 펌프질한 흔적도 없지 않다. 재경원인들 모든 부처의 울먹임을 다 들어줄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첫째로, 국민 입장에서는 미래에 대한 투자 소홀이 미덥지 않다. 말만 「미래로 미래로」 하면서 과기투자에는 짠 행정의 본색만 같다. 둘째로, 국민들 입장에서는 속은 느낌도 없지 않다. 명색이 정부 사람들이 그럴듯한 청사진으로 21세기가 찬란하게 뚫릴 것처럼 홍보해 놓고 이렇게 바람을 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청와대나 국무총리실에 부처간 사전조정 조율을 맡는 이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는 반문도 생긴다. 한 부처가 깃발을 치켜들고 단독 드리블로 국민을 부풀게 하고 다른 쪽이 『그것만 중요한게 아니다』고 견제하는, 그런 행정의 반복은 자원낭비이고 행정효율과 민(民)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짓이다. 그런 일이 과기특별법 같은 한 건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공기업 민영화」가 흐지부지되는 것도 큰 틀에서 비슷하지 않을까. 개혁차원에서 모든 공기업을 팔아 주인을 만들고 낭비와 비능률을 제거한다던 기염이 온데간데 없다. 공기업 종사자들이 저항하고 거기 자리를 넘보는 정당 관리들이 태업을 하자 이제 전문경영인을 내세워 경영개선이나 한다는 식이다. 민영화 플랜을 짠 것도 행정 공무원이요, 경영개선이라는 물타기 개혁으로 얼버무리는 것도 공무원이다. 그러니 「관리란 자기네들을 위해 일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파킨슨의 법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열매」없이 쭉정이만 남아 ▼ 그들은 정권에서 정권을 넘어 존재하는 「영원한 제국」인가. 모르긴 해도 연구개발비의 「획기적」증액이나 공기업 민영화는 반드시 차기 차차기 후보의 공약으로 내미는 이가 있을 테고, 「서두르자」는 공무원과 「안된다」는 공무원들이 갈릴 것이며, 그리고 어느쪽도 다치고 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행정의 세계에선 장미빛 꿈을 파는 이와 깨뜨리는 양자 모두 국가자원 낭비하고 국민을 웃기고 울리면서 공생공영할 것이다. 그만큼 기업세계와 다른 것일까. 때가 되면 실적이 드러나고 판단의 잘잘못이 밝혀져 가차없이 생사가 갈리는 이사회같은 것이 없기 때문인가. 金 忠 植 <정보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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